[특별기고 - 안태환]

기후위기로 인해 기존 문명의 틀 또는 방식을 폐기해야 하는 위기 상황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6세기에 스페인 군대가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문명을 파괴하고 난 뒤 17세기에 대안인 유럽 문명이 제대로 정착되지 못해 커다란 위기 상황이었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문명의 전환적 위기와 상응한다. 적어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17세기는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와 문화의 원류가 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라틴아메리카의 혼혈인(메스티소)들이 사회적 주체로 강력해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특히 잉카제국의 영토였던 안데스 지역에서 그러하다.

안데스 지역은 콜롬비아 남부에서부터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북부까지 이르는데 특히 페루와 볼리비아가 핵심이다. 페루는 45퍼센트, 볼리비아는 55퍼센트가 원주민이다. 이 지역에는 잉카 이전부터 시작해서 스페인의 식민지 시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원주민 문화인 아이유(Ayllu)라고 하는 혈연중심의 친족 공동체 문화가 아직도 살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자급자족을 하는 전통적 농업을 기초로 공동생산, 공동소유의 문화를 지켜 왔다는 점이다. 근대성(발전 또는 성장 중시), 신자유주의(개인주의) 문화에 편입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현재의 위기에 오히려 아이유(공동체)문화가 다시 소중하게 주목되고 있다. 

원주민들은 현재의 신자유주의 문화에만 편입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식민지 시기에도 스페인의 지배권력 체계에 편입되지 않고 어느 정도 ‘자율성’을 유지했다. 이를 ‘두 개의 공화국’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원주민은 흑인노예들과 달리 어느 정도 정치적 경제적 자율권을 가졌다. 우리가 일본에 합병된 뒤 일본이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폭력적으로 우리를 말살한 것과 맥락이 매우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스페인 식민정부가 원주민과 원주민 이외 집단을 분리해 별도로 관리한 것이다. 그 이유는 특히 지나친 조세 부담 또는 노동력 착취로 원주민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스페인 정부가 싫어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원주민은 가톨릭의 중요한 선교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즉 무조건 착취만 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보호의 대상이었다. 원주민이 다 없어지면 선교도 못하고 노동을 할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정복 초기에 효과적인 식민 통치를 위해 스페인 사람과 원주민의 결혼을 장려했다. 그러나 정복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난 뒤에 인종의 혼혈정책에서 분리정책으로 선회했다. 왜냐하면 혼혈정책으로 메스티소가 생겼는데 그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반란의 위협 외에도 이들은 조세의 의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스페인 정부의 경제적 부담만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유 공동체 관련 그림. (이미지 출처 = 유튜브 Sergio Alba 채널이 올린 동영상 갈무리)

아무튼 원주민들은 잉카 이전부터 이어진 아이유 친족공동체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는 일정한 공동체 토지가 주어졌고 토지의 공동 사용권을 보장해 주었다. 그 대신 원주민은 조세 납부와 부역의 의무를 졌다. 그렇게 강제 노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 노동을 그들은 집단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수행했다. 어느 의미에서 원주민과 스페인 정부는 서로 협약을 맺은 것이다. 조세 납부는 화폐로 납부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부역노동으로 광산, 작업장과 스페인 출신 귀족의 농장인 엔코미엔다에서 이루어졌다. 스페인은 엔코미엔다를 통해 원주민의 강제 노동의 대가로 그들을 가톨릭에 귀의시켜 영혼을 구해 준 것을 들었다.

콜롬버스가 남미를 발견(?)한 것은 1492년이지만 구체적으로 스페인의 정복이 시작된 것은 주로 1520-30년대부터였다. 그런데 1542년에 벌써 스페인 왕실은 ‘법적으로’ 원주민을 스페인의 일반적인 ‘신민’으로 인정하게 된다. 1551년에 열린 바야돌릿 신학논쟁에서도 “원주민도 영혼이 있다”는 멕시코 치아파스 주의 주교였던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신부의 진보적 주장을 스페인왕실은 받아들였다. 물론 현실적으로 엔코미엔다의 주인인 귀족들에 의해 위 칙령이 지켜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약 백년 뒤인 17세기 말부터 엔코미엔다는 쇠퇴하게 되고 18세기 말에 폐지된다. 그 대신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아프리카로부터 흑인노예를 수입하게 된다.

볼리비아의 포토시 광산의 구체적 사례를 들여다본다면 16세기 후반 포토시 광산의 은은 스페인의 가장 큰 소득원이었다. 강제노동의 방식은 성인 원주민 남성이 7년을 주기로 매번 1년에 걸쳐 포토시 광산에서 집단적으로 노동을 제공했다. 이 제도를 미타(mita)제도라고 한다. 과거 우리나라의 노비와 같이 양반과 관청의 노예노동을 평생토록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스페인에 의해 착취를 당할 때도 원주민들은 ‘집단적’ 노동을 통해 그들의 공동체주의 문화, 즉 자신들의 정체성을 그대로 오늘까지 유지하게 된 것은 원주민들로서는 무척 다행한 일이 된 것이다.

아이유 공동체 관련 그림. (이미지 출처 = 유튜브 Sergio Alba 채널이 올린 동영상 갈무리)

여기서 ‘집단적’ 노동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 원주민의 ‘구어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즉, 구어문화는 집단을 통해 조상으로부터의 공동의 기억이 이어지는 ‘연대성’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안데스 원주민들은 원래 유토피아를 강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문화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후대에 전하게 된다. 항상 마음으로부터 현실의 폭력적 질서가 아닌 ‘대안적’ 질서를 모색한 것이고 특히 지역의 축제를 통해 이런 구어문화가 생명력을 가졌다. 그런데 원주민 남성들이 이 노동을 피해 도망가면 원주민 여성들이 대신 조세 의무를 지었고 원주민 공동체에도 여성들이 많이 잔류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에도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적 사회운동의 주체가 대부분 여성들인 것도 그 맥락이 이해된다. 

스페인 당국은 이들 여성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직물제조를 시켰다. 오늘날도 이들 지역에 여행 가서 구입하는 공예품이 대부분 안데스 고유의 직물인 것도 흥미롭다. 그런데 이런 여성들의 노동도 잉카 이전부터 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실을 짓고 옷을 만들던 것이었다. 이런 공동체성이 오늘날에도 안데스 지역 국가들에서 개인적으로 옷을 파는 상인들이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일하는 근대적 자본주의 경제 방식이 아니라 항상 공동체의 이익을 병행하는 독특한 전통이 살아 있게 만든 것이다.

이들의 공동체성은 오늘날에도 안데스 지역 국가들에서 개인적으로 옷을 파는 상인들이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일하는 근대적 자본주의 경제 방식이 아니라 항상 공동체의 이익을 병행하는 독특한 전통이 살아 있게 했다. (이미지 출처 = EBS 다큐프라임 동영상 갈무리)

안태환(토마스)
한국외대, 대학원 스페인어과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사회학과, 콜롬비아 하베리아나대 중남미 문학박사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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