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성찰 - 권오상]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20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베른하르트 헤링의 윤리신학

‘윤리’를 주제로 글쓰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나 역시 윤리에 관한 글은 쉽게 읽지 않을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재미없고, 지루하고, 딱딱하고, 보기에 따라서 말도 안 되는 서구식 철학적 사유를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암기식 정보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결론의 결과물인 사회적 통념이나 관습을 따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우리 사회가 빠른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론만 숙지하다 보니 전체적 그림을 보기가 힘들다. 전체적인 것을 보는 이유는 그것에서 상상력과 창의력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효율은 떨어지지만, 기초는 탄탄해진다.

엄격한 얼굴

“교회 안에는 항상 엄격주의와 이완주의가 공존한다. 그리고 교회 역사를 보면 이완주의와 엄격주의가 서로 다툴 때마다 항상 엄격주의가 승리했다”라는 것이 교회 내부를 바라보는 윤리신학자들의 시선이다. 종교적 원칙이나 규범을 적용할 때, 어떤 해석과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양자로 갈라진다. 양자의 간극이 좁아지면 합의에 이를 수 있으나, 간극이 멀어질 때는 어느 한 편이 득세한다. 그리하여 역사적으로 승리한 엄격주의적 윤리관에 따라 선악이 판단되었다. 엄격함이 교회의 주류가 된다. 교회가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표방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엄격함이 교회 내부와 세상을 향해 회초리를 든다. 이런 엄격한 윤리 잣대로 타인과 사회를 향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지금과는 정반대의 현상이지만, 피렌체공의회(1439-45)의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선언의 영향으로 1900년대 초반까지도 가톨릭 신자가 보기에 개신교 신자는 이미 지옥행이 예정된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그들을 교정하고 참회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선행과 상관없이 말이다. 마치 강도를 만난 사람을 도와주었던 착한 사마리아인의 선행이 인정받기보다는 ‘이방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존재론적, 윤리적 죄인으로 규정된다. 다행히 이런 경향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라는 전향적인 태도로 바뀌면서 반감된다.

엄격주의가 항상 옳거나 교회 통치의 본질이 아님에도 항상 주류였던 까닭은 무엇일까? 교부 시대에 발전되어 중세 시대에 확립된 엄격주의는 얀세니즘이 대표적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얀센(Cornelius Jansen, 1585-1638)은 루뱅대학교의 총장을 지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심취한 후 극단적 엄격주의로 교회의 윤리와 전례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다. 이후 여러 교황이 얀세니즘을 이단으로 배척했음에도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전파되었고, 프랑스 출신의 선교사들이 진출한 초기 한국교회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 영향으로 한국교회도 1960년대까지도 공복제 규정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영성체를 하기 위해서 자정이 넘으면 침도 넘기면 안 된다고 생각해 손수건으로 혓바닥을 닦아야 했다. 이러한 전례 규범의 엄격한 준수는 미사 강론이나 고해성사 중에도 발견된다. 미사의 강론시간은 규범을 지키지 않는다고 신자들이 혼나는 시간이 되고, 고해성사는 야단과 질책을 받는 시간이 되었다. 어떤 이는 이런 교회의 모습에 숨통이 막힌다고 하지만, 한편에서는 교회가 너무나 느슨하고 이완된 구원과 윤리적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신자가 교회를 떠난다고 보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오히려 강화된 엄격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쯤에서 교회의 공식적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교회의 입장은 극단의 엄격주의와 극단의 이완주의 모두를 배척한다. 즉 적응을 구실로 하는 기회주의적 타협이나 야합(이완주의)도, 그리고 순수성을 수호한다는 빌미로 내세우는 극단적 원리주의(엄격주의)도 거부한다. 교회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 도덕이나 계율을 모든 사람에게 확대해 일반화하는 주장도 배척해 왔다. 이러한 교회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엄격주의는 경건주의와 결탁해 여전히 우리 신앙생활 주변을 맴돈다. 현대의 경직된 성직주의를 살아가는 사제들은 복음을 두려워하고 교회법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훨씬 효과적인 통치수단이고, 역사적으로도 입증된 방식이기 때문이다.

위기 앞에서

베른하르트 헤링 신부. (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가톨릭교회는 ‘신앙’과 ‘윤리’에 관해서 자부심이 있다. 사실 자부심을 넘어 이 2가지 사안에 대해 오직 교회의 교도권만이 유권해석 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교회가 이 2가지 사안에 대해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이것들을 통해 교회의 존립이나 존재 이유가 설명될 수 있고, 만일 이 둘 중에 하나라도 흔들리면 교회의 뿌리마저 흔들리는 역사적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7세기의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는 수덕생활을 극단적으로 실천했던 얀세니즘과 정반대로 모든 행동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은총만 강조한 신비생활의 극단이었다. 정적주의자들은 신비주의에 입각한 독보적인 신앙생활을 했지만, 지나치게 느슨한 전례나 성에 대한 윤리의식을 전파했고, 그 결과 교회 교도권의 배척을 받는다. 그들의 신앙은 뛰어났지만, 윤리적 실천에는 무기력했다. 이처럼 신앙과 윤리의 부조화는 현실 세계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현대 교회에서도 신앙에 대한 지나친 엄격함이 강요될 때 문제가 된다. 진정한 신앙은 강요가 아닌 자유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 없이 강요된 신앙은 윤리의식의 나약함과 빈곤함을 초래한다. 따라서 신앙을 앞세워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종교가 권력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변조, 위조, 날조된 신앙으로 변질된다. 그러니 아무리 훌륭한 신앙적 진술이나 체험이 태동하더라도, 건강한 윤리적 태도나 가치관이 동반되지 못하면 그 신앙은 살아남지 못한다.

가톨릭교회 역시 이런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종교개혁이 가톨릭교회가 권력화하는 과정의 위기라면, 종교개혁 이후 500년이 지난 지금, 가장 큰 위기를 체감한다. 바로 아동 성추문이 위기의 중심에 있다. 아동 성추문은 어쩌면 가장 엄격한 모습을 한 교회가 윤리적 타락의 길을 걸은 대표적 사례다.

전설을 찾다

삶의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데는 사회적 가치관이나 개인적 취향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작용한다. 우선순위를 설정하기 위한 것이 공동체나 사회적인 과제일 때는 또 다른 양상이 된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개인적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엮여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제를 선정하는 과정은 사회적 합의에 따르면 되겠지만,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은 또 다른 차원이다. 쉽지 않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것이 현실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전통이다.

전통 안에는 전설이 있고 전설적인 영웅담이 있다. 이 영웅담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포함한다. 지금은 전설로 남아 있을 법한 영웅담이 인간의 선택 행위 선상에서 이루어짐을 기억한다면, 인간의 선택과 행위가 끼치는 영향력은 상상 이상이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윤리적 성찰과 법적 책임을 수반한다. 나의 상식으로, 윤리는 행위 이전에 오지만 법은 행위를 한 이후에 온다. 윤리를 준수하지 않는다고 비난받을 수 있지만, 경찰이 출동하지 않는다. 법을 위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은 최소한의 질서지만 윤리는 자신의 양심이나 가치관 또는 종교적 가르침에 근거하여 규범이나 원칙과 규칙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윤리적이라 함은 법이 요구하는 이상의 것, 즉 덕의 차원을 살아가는 것이라 여기기도 했다. 또한 그것이 공동의 이익에 부합할 때 실정법으로 제정되기도 한다. 이에 비해 현대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법적 질서가 아니라, 선으로 초대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한다.

소통하기 위해

베른하르트 헤링(Bernhard Häing), 그는 가톨릭 사제다. 그리고 나처럼 구속주회 회원이다. 그의 이름이나 명성은 자주 접했지만, 그가 구체적으로 가톨릭 사상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쳤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에 대한 소개나 연구가 미비했기 때문이다. 그는 독일인의 근면성을 입증이라도 하듯 하루 10시간을 일했다. 물론 연구와 저술 활동과 강의가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그것을 일로써 받아들이고 정신노동의 길을 선택했다.

그런 고된 작업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행복한 구속주회 회원’으로 소개한다. 예수의 산상수훈에 등장하는 “행복하여라!”의 대상이 바로 자신임을 잘 알았던 까닭이다. 상상해 본다. 그가 행복하지 않았다면 교회, 윤리, 사상 심지어 복음조차도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고, 불행한 영혼에서 출발한 사상은 올바른 현실에 대한 인식과 현실의 장벽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누리는 행복을 기반으로 자유와 충실의 모습으로 교회에 헌신했다. 무엇보다 믿음과 희망을 품고 기여했다.

베른하르트 헤링은 자신을 '행복한 구속주회 회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미지 제공 = 가톨릭평론)

그의 인성과 가치관은 교회와 사회를 이어 주는 교량 역할을 했다. 그는 “교회가 세상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세상 역시 교회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 했다. 불통은 단절을 의미하고 지옥을 상징한다. 교회는 세상을 진리로 이끌고, 교화하고, 성화해야 할 임무가 있다. 교회 안에 신앙인으로서 교황, 주교, 사제, 평신도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자신만의 철옹성을 쌓는다면, 단절된 제국에 사는 것과 같다. 자신만을 위한 유토피아, 그들만을 위한 제국은 필연적으로 세상에서 소멸된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귀 기울이는 것, 그들의 호소와 절규에 관심을 두는 것은 교회의 기본 사명에 부합한다. 그는 ‘듣는 것’, ‘대화하는 것’, ‘소통하는 것’은 교회의 존망을 가르는 본질적 태도임을 직시했다. 이것이 세상과 교회가 함께 공존하고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나는 그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세속의 세계와 위기의 교회가 서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실마리를 얻기를 희망한다.

충격적 체험에 묻고 답하다

베른하르트 헤링은 1912년 11월 10일 독일 남서부의 뵈팅겐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뵈팅겐은 800여 명이 모여 살았고, 인구의 7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는 곳이었다. 해발 950미터에 자리 잡은 이곳은 풍족하지 않았지만 자립하기에 충분한 환경이었다. 그는 5남 7녀 중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녀들은 부모의 기도를 들으면서 성장할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다.

그는 유년기에 1차 세계대전을 경험했고, 사제서품 후에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야 했다. 전장에서 형을 잃은 그에게 “전쟁은 두려움과 상실감을 동반한 충격적 체험”이었고, “어리석은 전쟁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시는 하느님”에 관해 지속적인 의문을 가진다. 이후 비상식적인 전쟁과 무기력한 하느님에 대한 의문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이해하면서 일정 부분 해소된다. 그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두려우면서도 이해할 만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이해 지평을 넓혀 갔다. 세계대전을 두 번씩이나 경험한 성장 배경은 그가 ‘폭력으로부터 해방’, 즉 평화윤리를 주장하게 되는 근본적인 동기가 된다.

그는 선교사의 소명을 염원했으며, 1933년 봄에 구속주회에서 수련하고 첫 서원을 한다. 1939년 5월 7일에 서품을 받고 몇 년이 흐른 뒤, 고향을 방문한다. 주로 사제가 신자들에게 축복하는 것이 상례인 것을 알았던 어머니는 자신을 방문한 아들에게 “여전히 내가 너를 축복해 줘도 되겠니?”라고 물었고, 아들 헤링은 “물론이죠! 이제부터 어머니의 축복은 제 반석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아마도 전쟁의 상흔이 그의 신앙을 뒤흔들 때, 어머니의 축복은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고,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의무부대에 편입되어 전쟁을 치렀고, 전쟁 후 브라질에 선교사로 파견되기를 원했지만 장상의 권유로 튀빙겐대학교에서 1947년 ‘종교와 윤리의 관계’를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는 이 시기를 자신의 정신적 지평이 넓어진 계기로 평가한다. 1년 반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곳에서 가톨릭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개신교 신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그가 이후 종교 일치 운동이나 종교간 대화에 깊게 관심을 기울인 이유이기도 하다.

1957년부터 그는 로마의 알폰시안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고, 1988년 은퇴까지 지속한다. 1950년부터 53년까지 사이에 그는 "그리스도의 법"을 저술해 1954년에 제1권을 출판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세간의 큰 관심을 받았고, 그리하여 세계 곳곳의 유수한 기관으로부터 초대된다. 그리하여 미국의 브라운대학교, 예일대학교, 뉴욕신학대학교, 조지타운대학교의 케네디생명윤리연구소, 가톨릭대학교, 샌프란시스코대학교, 포담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한다.

그는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문헌작성을 위한 준비위원회에 소속되어 공의회 헌장인 '현대 교회의 사목헌장'(Gaudium et Spes, 기쁨과 희망)과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Optatam totius, 온 교회의 열망)을 작성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다. 1988년 모든 강의에서 은퇴한 후 독일 가르스 암인(Gars am Inn)의 구속주회로 돌아왔다. 은퇴한 후에도 병마의 고통 중에 있었지만, 그는 많은 저술 작업에 매진하면서 교회 안팎의 뜨거운 감자를 다루는 데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르게 바라보다

헤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윤리신학은 주로 결의론과 교회법에 관련된 질문에 답하기 위한 학문이었다. 마치 철학이 신학의 시녀라는 말처럼 교회 학문을 해설하기 위한 축소된 분과 학문에 불과했다. 결의론(決疑論, casuistry)은 넓은 의미에서 ‘보편적 규범을 정확하게 적용하기 어려운 특정한 경우에,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는 기술’이다. 행위의 동기와 목적을 살펴서 행위의 도덕성, 즉 옳고 그릇된 것을 살피는 것으로 그리스도교 윤리학에 많은 기여를 했지만, 다른 한편 그것이 유일한 표준이 될 때,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헤링은 윤리학이 교회법을 해설하거나 선악을 결정하는 지엽적이고 축소된 학문에 머무른 것을 안타까워했다. 예를 들면, 윤리신학은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를 위한 일종의 지침서 같은 역할을 했다. 고해사제는 죄를 고백하는 고해자에게 죄에 상응하는 일정 부분의 벌을 주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 죄의 경중을 세부적으로 분류한 지침이 필요했다. 고해성사는 마치 재판관이 피고인에게 판결을 내리고 그에 걸맞은 보속(죄에 부합하는 벌을 수행하는 행위)을 부과하는 절차를 밟았다. 고해성사가 외적 법정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사제는 재판관이 되어 죄를 용서하고, 고해자는 피고인이 되어 죄를 용서받는다. 이런 모습은 고해자에게 구체적 지시를 하고, 죄의 종류와 횟수까지 꼼꼼히 따지는 고해사제를 떠올리게 된다. 결의론과 교 회법에 기초한 고해성사다. 하지만 헤링은 이러한 고해성사의 모습은 예수나 복음 정신에 기초한 것이 아니며, 고해사제는 재판관이 아니라 돌아온 탕아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헤링은 복음 정신에 입각한 그리스도 중심의 윤리신학을 주장했고, 그의 윤리저술인 "그리스도의 법"도 그러한 의도를 표현한다.

내가 경험한 고해사제의 역할은 죄가 아닌 경우 안심시켜 주어야 하고, 낙담한 사람을 위로해 용기를 주어야 하며, 곤경에 처한 사람을 설득해 희망을 품도록 하는 것이다. 고해사제는 죄의 경중을 따지면서 어떻게 살라고 지시하거나 어설픈 질문으로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고백을 통해 선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응원한다. 사제는 죄의 고백을 들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는 못하지만, ‘교회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개방하고 다가오는 고해자에게 하느님을 닮은 아버지가 된다. 고백을 듣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교회가 사제에게 부여한 아름다운 특권이다. 동시에 고해사제는 고해자로 인해 복음화되고, 인내라는 산을 넘고 두려움의 강을 건너면서 성장한다. 고해사제와 고해자가 함께 복음의 기쁨을 체험하고, 성장하며, 성화된다.

헤링의 고해성사에 대한 윤리적 지평은 결의론이나 법률적 범주를 넘어서 복음에 입각한 존재론적 변화를 끌어낸다. 또한 세상에 대한 지평 역시 확장되어 단지 고해사제의 죄에 대한 질문뿐만 아니라, 개인의 영역에 속한 문제와 현대의 사회적 문화적 감수성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창의적이고 비평적인 입장에서 그 의문에 응답하는 방향으로 윤리신학이 쇄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윤리신학은 ‘시대의 징표’가 요구하는 현대 사회의 문제와 도전을 직면하고, 신앙의 도움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결국 그는 윤리신학의 새로운 지평과 재구축이라는 커다란 과업을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헤링의 윤리신학을 소개하면서, 우리 시대의 문제와 도전에 응답하는 신앙의 길을 함께 탐색해 보고 싶다.

권오상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소속의 사제회원이며, 구속주회 한국지구장 소임을 살고 있다.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에서 생명윤리학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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