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사순절은 치유의 시간”

교종.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2월26일 재의 수요일을 맞아 전통적으로 로마 성 사비나 대성당에서 재의 수요일 미사를 집전했으며, 이에 앞서 성 안젤모 성당에서 아벤타인 언덕의 성 사비나 대성당까지 십자가의 길 회개 행렬을 이끌었다. 교종은 이날 재의 예식을 통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우리 육신은 결국 먼지로 돌아가게 될 것을 생각하자고 말했다.

말씀 요지.

우리는 우주에서 먼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받고 있는 영생을 향한 소중한 먼지입니다. 우리는 땅의 먼지이며, 하느님께서 그분의 하늘을 부어 주셨으며, 꿈을 담은 먼지입니다. 또 우리는 하느님의 소망이며 그분의 보물이자 영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마에 받는 재는 우리의 존재방향, 즉 먼지에서 생명으로 가는 통로를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의 손에 의해 형성되도록 한다면 놀라운 것이 됩니다. 사순절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오늘 바르는 이마의 재가 우리들의 마음을 관통하는 생각에 영향을 미쳐야합 니다. 우리는 스스로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를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현실을 피하기 위해 살고 있다면 먼지를 좇아 삶에서 죽음으로 돌아가 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하느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살면 사랑의 불이 우리 마음에 빛을 밝히게 합니다. 세상의 재산은 쓸모없고 먼지로 뿌려질 것이지만 가족과 직장, 교회와 세상에서 우리가 나누는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며, 우리를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재는 우리에게 ‘죽음의 먼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전쟁, 빈곤층과 노인을 소외시키는 것과 가족싸움은 모두 우리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사랑을 약화시킵니다. 우리 각자 마음속으로 내면을 들여다봅시다. “나는 위선의 재로 하느님의 불을 몇 번이나 끄는가!” 성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우리에게 마음을 덮고 있는 모든 먼지를 깨끗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 참조) 그는 이방인에게 동사의 수동적 형태를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노력으로 거룩함이 성취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화해와 거룩함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알고 사랑하는 예수님만 치유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사순절은 치유의 시간입니다.

 

 “기도와 금식, 자선은 새로운 삶의 결심”

교종, 2월26일 재의 수요일 일반접견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종은 재의 수요일인 2월26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진행된 수요 일반접견 가르침을 통해 신자들에게 성 금요일부터 부활주일까지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이르는 여정을 따라갈 결심으로 사순절기간 동안 기도와 금식과 자선을 수행하도록 초대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재의 수요일 부활절 준비를 위한 연례 사순절 여행을 시작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사순절에 공생활을 준비하시기 위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하신 예수님을 본받습니다. 영적 관점에서 사막은 죽음이 아닌 삶의 장소입니다. 이곳은 내면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사랑의 부르심을 경험할 수 있는 침묵의 장소입니다. 바쁜 세상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열린 마음을 키우며, 마음의 찌꺼기를 걸러내고 정말로 중요한 것들에 우리 마음을 집중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침묵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사순절 사막경험의 중요한 부분은 금식의 관행입니다. 금식을 통해 빈번하고 피상적인 추구에서 우리 삶이 얼마나 자주 소비되는지를 인식하도록 훈련시킵니다. 사막의 고독은 우리의 도움과 위로를 위해 조용히 외치는 사람들에게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듭니다. 사순절 우리의 기도, 금식 및 자선은 성 금요일부터 부활주일까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여정에서 주님을 따르고 모든 사막을 정원으로 만들 수 있는 그분 은혜의 힘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이러한 사순기간의 기도와 금식, 자선이 우리들의 새로운 삶에 대한 결심에서 우리를 강화시켜 주기를 바랍니다.

 

“직책이 아닌 봉사는 교회의 위대함의 척도”

교종, 2월25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2월25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교회 직책을 위한 신자들의 열정과 질투와 뒷담화를 경고했다. 교종은 주님은 우리를 겸손하라고 부르시며 세속적인 욕망은 하느님의 원수라고 강조했다. 

강론 내용.

오늘 복음(마르 9,30-37)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면서 세속과 타협하고 세상의 정신을 따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 한다면 결국 하느님의 적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높아지려는 야심 때문에 누가 가장 큰지 논쟁해 왔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남보다 높아지고 커지기 원하는 이런 태도는 ‘세상의 정신’입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도 야고보 사도는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야고보 4,4 참조)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세상적 염려에 대한 우려는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합니다. “나는 이것을 받을 자격이 있고, 그 사람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세상적인 것입니다. 세상의 정신입니다. 

복음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누군가 타협하면서 복음대로 살기를 원할 때 그는 궁극적으로 세상의 정신에 속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더 높아지고, 지배하고, 더 커지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전쟁과 수많은 싸움은 결국 세속적 욕망과 열정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질투는 다른 사람을 파괴하게 만드는 바이러스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많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도들 사이에서 누가 가장 중요한가?”는 항상 더 높은 곳을 향해 노력하는 출세주의자와 같이 세속적으로 감염된 사람들을 잘 표현한 대목입니다. 바로 이것은 세상의 정신이며 그리스도인의 정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아니요! 내 차례야! 더 많은 재산과 더 많은 권력을 얻으려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해.” 이것이 세상의 정신입니다. 여기에는 사악함이 있습니다. “그거 어디서 났어? 부러워” 부러움은 악마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돈에 대한 욕심은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1티모 6,10) 돈과 권력에 대한 부러움과 질투를 통해 악이 세상에 들어옵니다. 부러움은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고, 다른 사람들을 전멸시키기 위한 벌레입니다.

교회의 위대함은 봉사에서 나옵니다. 제자들 사이의 토론에서는 세속적인 모든 열정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그들을 ‘모든 이의 종’으로 부르고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교회에서 누가 가장 중요합니까? 교종, 추기경, 주교, 수도자, 본당신부, 평신도회장? 아닙니다.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자신을 모두의 종으로 만드는 사람,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그들 가운데 두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부드러운 말씀으로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7절 참조) 즉, 가장 겸손한 사람, 가장 많이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정신에 대항하는 길은 오직 겸손입니다. 출세의 사다리를 오르지 않고 끝자리를 선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십시오. 세상적인 것은 ‘하느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세상의 정신과 거래하기 위해 타협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매우 현명한’ 격려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파스카의 신비는 회심에 기초를 둡니다”

프란치스코 교종, 2020년 사순절 메시지에서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사순절 담화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과월절의 파스카 신비를 회심의 기초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교종은 메시지에서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 5장20절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구절을 인용했다. 특히 교종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회개를 위한 ‘은총의 시기’에 우리는 주님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한편 특히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라고 권고했다. 

메시지 내용.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를 위한 은혜로운 때’를 다시 한번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오히려 이 새로운 ‘기회’에 감사하면서 우리들의 무기력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교회와 세속의 삶과 마찬가지로 우리 삶 속에는 이따금 악이 스며듭니다. 그럼에도 우리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주어지는 이러한 기회는 끊임없이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강한 뜻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과 대화하시려는 뜻은 매우 강렬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뜻은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종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시다’(Deus Caritas Est)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성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원수까지도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통해 모든 인간과 나누길 바라시는 대화는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로 세월을 보내는’(사도 17,21) 잡담이 아닙니다. 실속 없이 가벼운 호기심으로 이뤄지는 잡담은 모든 시대의 특징인 세속성을 드러냅니다. 특히 우리시대에는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자유롭고 너그러운 응답으로 ‘예수님 죽음과 부활의 위대한 신비’의 영적인 힘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기쁜 소식, 곧 복음선포를 귀 기울여 받아들이는 데서 솟아납니다.이 복음선포를 믿는 이들은 삶이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거짓을 믿지 않습니다. 

생명은 하느님 아버지 사랑에서 우리가 생명을 얻어 넘치게 하려는 그분의 뜻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요한 10,10 참조) 반대로 ‘거짓의 아비’(요한 8,44)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면 부조리의 심연으로 끌려들어가 지상에서 지옥을 경험하는 위험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개인과 공동체가 경험한 온갖 비극적 사건이 이를 입증합니다. 

지난해 10월7일 묵주기도의 복되신 마리아 기념일에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서명한 이번 사순시기 담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파스카는 성령의 권능으로 언제나 현재의 사건이 되어 고통받는 이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의 몸을 믿음으로 알아보고 만져볼 수 있게 해 줍니다. 파스카 신비의 은총으로 우리는 하느님 자비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이 하느님 자비는 우리의 회개와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관계 안에서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의 대화는 벗끼리 나누는 허심탄회한 대화입니다. 그러기에 사순시기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에 응답해야 할 시급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기도합니다. 

기도는 다양한 형태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 속을 꿰뚫고 무디어진 우리 마음을 다듬어 주어 우리 마음이 더욱 하느님의 뜻으로 돌아서게 해 주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는 회개의 때와 방식을 우리 멋대로 할 수 있다는 오만한 망상으로 은총의 사순시기를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받아들일수록 우리는 거저 베풀어 주시는 그분 자비를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파스카 신비를 삶의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무고한 희생자 안에 깊이 각인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상처에 우리도 같은 아픔을 느낀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 무고한 희생자들을 양산해 내는 원흉으로 전쟁과 태아에서 노인에 이르는 인간생명에 대한 공격, 수많은 형태의 폭력, 환경재해, 불공평한 분배, 인신매매, 일종의 우상숭배인 이윤추구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 있습니다. 부는 나눠야 합니다. 오늘날 공정한 세상을 이룩해 나가는 데 있어 개인적 참여인 기부를 통해 궁핍한 사람들과 재산을 나누는 선의의 사람들을 일깨워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선의 나눔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듭니다. 반대로 부의 축적은 사람을 이기주의에 가두어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제의 구조적 차원들을 깊이 숙고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이유로 사순기간인 3월26일부터 28일까지 아시시에서 경제학자들과 기업인들, 경제혁신 주역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계속 강조한 것처럼 정치는 ‘사랑의 탁월한 형태’입니다.(비오 11세, 1927.12.18. 연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도 복음정신, 참 행복의 정신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시시 경제회의 목표는 지금보다 더 공정하고 포괄적인 경제를 일구어 나가는 데 있습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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