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구영주]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권혁란, 한겨레출판, 2020

어느덧 푸른빛의 새벽을 지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코로나19로 도처에서 죽음의 공포가 넘실대던 3월 어느 날 아침, 나는 결국 밤을 새우고 말았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채 한참을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작가 권혁란. 페이스북에서 친구관계로 맺어진 작가이지만 사실 일면식도 없는 분이었고 아주 가끔씩 짧은 댓글 정도만을 주고받던 사이였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작가가 관통해 온 시간의 무늬 같은 것이 내게도 깊게 배어 드는 기분이었다. 하루를 꼬박 세워 어머니의 죽음에 관한 기록들을 하나하나 숨죽여 따라가면서 죽음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마음으로 천천히 물들어 갔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슬프고 쓸쓸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아름답고 따뜻함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이토록 따뜻하고 맑을 수가 있나. 이토록 꾸밈없이 섬세할 수 있나. 읽는 내내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 읽고 난 뒤 나는 오히려 어머니를 잃은 작가에게 말할 수 없는 위안 같은 것을 받고 있었다. 

구순의 어머니. 
김봉예 여사. 

작가의 말대로 ‘봉황의 이름을 가진 한 여자의 마지막 2년’의 기록을 그의 막내딸인 작가가 남겼다. 늙고 병들어 마르고 딱딱한 나무토막처럼 변해 가는 엄마의 몸을 바라보며 솔직하고 과감하게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써내려갔다. 때로는 답답해서 지겹고 때로는 화가 날 정도로 가슴 짠한 엄마. 그 엄마라는 이름의 한 여자를 자신 또한 엄마가 되어 두 딸들을 키우며. 다시 또 그 엄마가 되어서. 

고아로 자라 어딘가에 뿌려진 무명의 씨앗처럼 살다 육 남매를 낳고 다시 어느 나무 아래로 사라져 버린 사람. 마치 ‘이것이 사람의 삶’이다를 말해 주듯 한없이 풍요롭게 열매 맺다 한없이 허망하게 가 버린 사람. 자식 여섯을 키웠지만 마지막 어머니의 집은 요양원이었다. 넓고 크고 탁 트인 전망을 가진 집. 깨끗한 침대와 시간 맞춰 나오는 밥과 간식. 그리고 따뜻한 산책과 두런두런 말벗이 있는 곳. 그 어떤 자식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조건을 다 가지고 있는 그곳이 어머니의 마지막 집이었다.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권혁란, 한겨레출판, 2020. (표지 출처 = 한겨레출판)

어머니는 그곳에 간 첫날 밤새 울다 잠들었지만 그 사실을 알고 그곳을 방문한 딸은 자신도 여기에 살고 싶다며 너스레를 떤다. 딸의 말을 들은 노기 어린 엄마의 심정을 섬세한 막내딸이 왜 모르랴. 작가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정해질 수밖에 없다. 다섯이나 되는 언니, 오빠 모두가 사정이 있다. 나이가 많은 그들도 아프고, 늙었으며, 각자의 이유들로 살아가기 어렵다. 게다가 어떤 누가 ‘모신다’는 것은 결국 ‘집에 가두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 뒤로는 섭섭함만을 앞세울 일이 아니었다. 

작가는 지금의 현실에 대해 담담히 말한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늙을 것이고 우리 부모들을 요양원에 보낼 것이고 우리도 가게 될 것이다. 누구도 생의 마지막과 보살핌을 자식에게만 맡길 수 없을 것이다. 자식이 없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남편이나 아내가 없는 사람도 더 많아질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고 한들 어차피 우리는 모두 단독자로 살아가다 죽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자식들도 천천히 늙을 것이고 우리 세대의 사람들을 요양원에 보내야 하는 것으로 마음을 아프게 앓을 것이다. 부모를 지고 간 지게에 내가 오를 것이고 그 지게를 내 자식이 지게 될 것이고 그 아이 또한 지게를 지게 될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한 개인의 역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가까운 미래이자, 누군가는 이미 지나갔을 과거이거나 현재일 것이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나이 든 부모를 나이 든 자녀가 돌보는 상황을 맞고 있다.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시대다. 단순히 효의 문제, 부모를 모시고 모시지 않고의 문제가 아닌 한 인간이 태어나 살다 죽는 일련의 생의 시간 속에서 사실상 가장 존엄하고 의미 있게 지켜져야 할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들이다. 무의미한 고통의 시간을 줄이고 순간을 넘기는 일시적 치료나 인공 의료 행위로 호흡을 끌고 가는 행위 말고. 한마디로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가질 시간이 필요한 문제다. 그런 시간을 가질 시스템과 제도를 논의해야 할 시간이다. 산소호흡기와 영양제를 맞으면서 고통스러운 생을 이어 나가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작가는 생각한다. 아니 다짐한다. 엄마처럼은 죽지 않을 거야! 

요양원에 잘 적응하고 있던 엄마가 새벽에 간병인을 깨우기 미안해 혼자서 화장실을 가려다가 고관절이 부러졌다. 고관절 수술 후 요양원과 병원 사이를 오가던 중이었다. 폐렴 기운이 가시질 않아 급히 큰 병원의 응급실로 가야 한다는 요양원 원장의 전화를 밤 10시에 받았다. 청주에 있던 엄마를 괴산의 병원으로. 왜, 굳이, 이 시간에. 지금 큰 병원 응급실로 가지 못하면 입원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급히 괴산병원으로 부랴부랴 내려가니 새벽 1시. 

사설 응급차에 실려와 아무도 없는 응급실 한구석에 혼자 누워 있는 엄마. 막내딸이 도착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엄마를 들여다보는 의료인은 없었다. 응급차 기사도 의료원 원장도 입원시킨 병원 관계자조차도. 이토록 긴 시간 방치되어 있을 거면서 수술한 지 얼마되지도 않은 분이 이렇게 ‘한밤중에 깨워져 이리저리 들어 옮겨졌을 엄마’를 보며 막내딸은 결국 눈물을 쏟는다. 손발은 차갑고 넋은 거의 나가있는 엄마. 얇은 환자복을 입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엄마 역시도 딸을 보며 운다. 막내딸을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고 그냥 계속 춥다고 말하면서 슬픔이 아닌 공포에 찬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엄마였다. 아들딸이 와도 엄마의 정신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작가는 말한다.

“자기 몸에, 자기 병에, 자기 죽음과 삶에 관해 단 한 가지도 결정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저기 저렇게 부려져 누워 있었다.” 

여전히 많은 이가 기계적 장치에 의지한 호흡과 더 나아가 기관 삽입으로의 음식물 투약을 시행하며 병원에서 무의미한 고통의 시간을 늘려 간다. 이는 자발 호흡이 끊긴 상태에서 인공호흡을 통해 ‘생명’이 아닌 그저 ‘목숨 유지’라는 측면만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환자가 겪는 진짜 고통은 오히려 철저히 소외된다. 우리는 여전히 그런 병원의 시스템에 우리 자신들을 내맡긴다. 자식들은 그래도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없다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 주장하지만 그것은 정말 누구를 위한 생명의 연장일까. 그 주인공이 나라면? 나 빼놓고 모든 이가 내 죽음에 관여하지만 정작 내 자신은 나의 죽음에 조금도 개입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누워 있다. 의식도 없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무한한 고통만을 되풀이하며. 

"폐렴기가 가시지 않는 엄마가 투레질을 하다가 목에 걸린 가래를 뱉어내지 못해 숨이 넘어가는 것 같다. 간호사를 불러와 말라붙은 입술을 열고 가래 흡입기를 목 안으로 들이민다. 흡입기 호스는 두껍고 딱딱해서 조금씩 밀어 넣을 때마다 엄마가 고통으로 진저리를 친다. 얼마나 아프기에 미동도 없던 손까지 들어 호스를 막아대는 걸까. (중략) 저기 저 아래 목 속에, 폐까지 들어찬 가래가 약간의 피와 함께 호흡기로 뽑여 나오고 단말마의 비명이 겨우 잦아들고 천신만고 끝에 진창 같은 잠으로 들어간 엄마를 도닥이며 다이고의 마지막 여행으로 다시 합류한다. (중략) 나는 이제 저 말을 하고 싶다. 엄마 귀에 대고 인사하고 싶다. “엄마, 고생 많았어요. 이제 가셔도 돼요. 이제 그만 아파요. 너무 많이 아팠잖아. 이제 잘 가요. 이 생에 와서 착하게 잘 살았잖아요. 아버지에게 가요.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면서 아버지 엄마처럼 세상에 무해한 사람을 만난 적이 한번도 없었어. 여한 없이 얼른 가요."(p136)

"온몸이 부어서 사실 엄마의 몸은 사람의 몸 같지 않았다. 소리 지르고 아파하다가 기진하면 숨도 없이 잠들었다. 숨 없이 자다가도 숨이 막히는가. 숨길을 트려고 가슴을 천장까지 들어 올리는게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 가래를 뽑아 달라해야 했다. 가래를 뽑는 것은 거의 고문에 가까웠다. (중략) 엄마 다리 왼쪽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다. 나무토막을, 바싹 마른 장작을 만져봐서 안다. 갈라진 무늬나 질감마저 온도마저 정말로 나무토막처럼 거칠고 딱딱하다. 부드러운 살이라곤 하나도 없이 다 흘러내려서 더더욱. 손은 부었다 식었다, 가라앉으며 천천히 소멸을 향해 마지막 항해중이었다." (p176)

어머니의 마지막은 영양제 투약도 멈추고 호흡기도 모두 떼어 달라고 자식들이 의사에게 눈물로 애원할 만큼 너무나 고통스럽고 지난한 시간이었다. 돌아가시기 전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병원에서 호흡기를 단 채 여러 번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들며 고통받는 어머니를 바라본다. 수시로 섬망 증세가 찾아오고 죽음 앞에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 가는 어머니. 그리고 질문한다. 엄마에게 죽음이란 무엇일까? 인간에게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이 병원을 나가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리라 다짐한다. ‘존엄을 가지고 살기 위해, 존엄을 가지고 죽기 위해’라는 조항에 동의한다. 그래서일까?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 보다 엄마처럼은 죽고 싶지 않다! 라는 작가의 말은 왠지 더욱 처절하게 들린다. 비록 먼지로 와서 먼지로 돌아가는 허무한 인생이어도 마지막 내 죽음 앞에, 나를 제외한 모든 이가 나의 죽음에 관여하는 불합리한 상황 앞에, 한 인간이 말할 수 있는 처절한 외침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 2월 4일 연명의료 결정제도가 처음 시행되었다. 작년까지 1년 8개월간 7만 996명이 연명의료를 유보하거나 중단했다. 연명의료는 임종과정 환자에게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 치료 효과 없이 임종과정만을 연장하는 의학적 시술을 말한다. 아직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보다 가족의 개입에 의한 결정이 많은 상황이며(이때 대개의 환자 본인은 의식이 없다) 그래서 자기가 온전한 정신일 때 미리 자기 결정권에 의해 연명의료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사회적 논의와 제도 확산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현재 우리나라의 치료 연명제에 따른 자기 결정권을 본인 스스로 진지하게 성찰하게 하는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기도 하다.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있다. 죽고 사는 것만큼은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존엄한 생명으로 태어난 우리는 하느님이 허락하신 시간을 기계적으로 인위적으로 무의미한 고통의 시간으로 마냥 늘리지 않고 주어진 시간 만큼만을 살다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 

죽음. 

여전히 말하고 싶지 않고 꺼려지는 단어.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삶의 너머에 있는 어떤 아득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나란히 존재하는 ‘또 다른 일상’이라는 사실을 더는 미루지 말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흔히들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죽음에 대한 고찰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는 이 책 덕분에 꽤 오랜 시간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묵상할 수 있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고 죽음이라고 하는 필연적 과정을 반드시 통과하게 될 우리 모두에게 진심으로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엄마의 죽음이 처음이듯 나의 죽음도 처음일 테니 말이다. 이토록 좋은 책을 써 준 권혁란 작가에게 개인적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오랜 고통을 감내하고 떠나신 김봉예 어머님께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평화의 안식을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칼럼과 서평 쓰기가 특기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여러 잡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현재 남편과 7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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