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꿔 본다

(존 앨런)

지금 전 세계에 대유행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지 3달밖에 지나지 않았고, 처음에는 그저 중국과 주변의 문제로 인식되던 것이 전 세계 문제가 된 지는 몇 주가 됐다.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대유행하는 상태, 즉 팬데믹의 영향은 확진자와 사망자의 숫자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놀랍게 늘어나는 가운데 그 숫자는 더 커지고 있다. 경제적으로 보자면, 수입과 생산이 줄어들며 주식시장이 무너지면서 채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16조 달러의 주식 가치가 줄었고, 국경을 가로질러 전 세계에 걸쳐 형성됐던 가치 사슬, 경제의 네트워크가 깨지면서 수출이 줄어들었다.

위기의 한복판은 늘 그렇듯 그 위기의 장기적 의미를 평가하기에 좋은 때는 아니다. 또한 코로나19의 영향을 농업혁명이나 인쇄기가 발명된 이래 지금까지 오래도록 미친 영향 같은 것에 비교해 보는 것도 좀 때가 이를 것이다.

그럼에도, 가톨릭적 측면에서, 지금부터 쉽게 예견할 수 있는 어떤 결과들이 보인다. 어떤 것은 거의 확실하고, 어떤 것은 그저 그럴 수 있어 보이거나 지금으로서는 예견할 수 없는 다른 요소들에 따라 달라질 것이지만, 그렇다. 이 두 가지에 대해 각기 두 가지씩 예견되는 결과들을 살펴보자.

가능성이 큰 결과들

(1) 보건의료에 초점을 둬야

세계적으로, 가톨릭교회는 의료시설 약 1만 8000개를 운영하고 있고 노인과 특별한 필요가 있는 이들을 위한 시설 등이 1만 6000개, 병원은 5500개가 있는데 65퍼센트가 개발도상국에 있다. 즉, 가톨릭교회는 전 세계에서 비정부기관으로서는 최대의 보건의료서비스 제공자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기반시설을 갖고 있음에도, 이러한 시설들과 제도교회의 관계는 상당히 느슨한 편이어서, 양측의 지도부는 상대측 지도부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거나 서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번지면서 이러한 관계는 변할 것이다. 주교들은 관내의 가톨릭 의료시설들이 얼마나 잘 준비되어 있으며 교회는 위기의 순간에 대응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더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을 것이고, 가톨릭 병원 지도자들은 가능한 그 어디든 친구를 더 많이 둬야겠다고 생각하게 될 것인바, 지금 의료계의 모든 사람이 그렇듯 이들도 현재의 위기 상황에 압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황청에서는 보건의료 분야에 책임을 진 곳은 온전한 인간발전 부서인데, 당연히 이 부서도 나설 것이다. 코로나19에 대한 긴 성명서가 이미 나왔고, 사태가 좀 누그러지면 이 부서는 이 사태의 교훈과 함의에 대해 뭔가 말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2) 노인에 초점을 둬야

코로나19는 치명성이라는 면에서만 보자면, 주로 노인들이 큰 피해를 입는 질병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건의료 위기 속에서는 나이 든 이들이 취약하고 고립된 상황에 놓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 안에서든 교회 안에서든 노인들을 더욱 존중, 존경하자고 여러 차례 촉구해 왔다. 그는 2015년에 있었던 한 일반알현에서는 노인을 무시하는 것은 “죄”(sin)라고 불렀다.

“우리가 젊을 때는 노년을 무시하고 싶어집니다. 마치 나이 든 것이 구석에 가둬 두어야 할 질병인 것처럼.” “하지만 우리가 늙어지면, 게다가 우리가 가난하고 병이 있고 혼자라면, 우리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짜인 사회가 실패했음을 몸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 사회는 결과적으로 노인들을 무시합니다.”

그는 “노인들이 존경받지 못하는 곳에는 젊은이에게도 아무런 미래가 없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계청년대회가 젊은이와 노인들 사이의 유대를 기념하는 축제로 변하면 좋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지금의 위기 속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생각을 다시금 떠올려 보게 될 것이다.

2020년 2월 21일 금요일, 애리조나 주 투손에 있는 성 하비에르 포교소 박물관 십자고상의 유리 케이스에 남자가 비치고 있다. (사진 출처 = CRUX)

앞으로 있을 듯한 결과들

(1) “신령성체”(Spiritual Communion)의 신학

가톨릭적 관점에서 봤을 때, 아마도 이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진행되고 있는 격리봉쇄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일요일에 미사를 보러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때마침 사순시기이고, 많은 신자는 성주간 전례에 직접 참여하여 성체를 받아 모시는 대신에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로 성주간 전례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 절절한 현실이다.

이러한 여러 제한조치들 속에서, 많은 사목자와 신학자들은 이것은 어쩌면 전통적인 “신령성체”(영적 영성체)의 개념에 쌓인 먼지를 털어낼 좋은 기회일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즉, 이러저러한 이유로 교회에 갈 수 없거나, 갈 수 있어도 영성체가 금지된 사람들이 미사와 성체성사에 일종의 참여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주 짧게 말하자면, 성체를 받아 모시고자 하는 원의는 그 자체로 은총이며, 어떤 이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안에서 그 원의를 봉헌한다면 그것은 더 큰 은총을 받고 영적으로 성장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탈리아의 아고스티노 마르케토 대주교는 교황청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원숙한 교회사 학자다. 그는 영성체를 할 수 없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할 것을 권고한다.

“저의 예수님, 성찬의 빵 안에 당신이 현존해 계심을 믿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고, 내 영혼 안에 당신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내가 성사적으로 당신을 받아 모실 수 없는 동안에는, 그래도 영적으로라도 내 영혼 안에 들어오소서.”

(짧게 쉬면서 자신을 예수님과 하나가 되게 한다)

“당신께서 오셨으므로, 저는 당신을 껴안고 나의 모든 자아를 당신과 하나되게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절대 떨어지게 하지 마소서.”

떨어져 있어야 할 순간에, 의심할 바 없이 꽤 괜찮은, 그리고 아마도 그래야 할 기도다.

(2) 전망

이것은 아마 가장 없을 법한 일이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그간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간에 끝없이 분열하고 상처를 주며 신랄하게 흥분 속에 싸우던 문제들을 달리 생각해 보는 새로운 관점이 나올 수도 있다.

지금까지 5000명이 넘는 사망자와 15만 명의 확진자를 낸 이 세계적 재앙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진짜 “죽느냐, 사느냐”에 대해 재고하게 될지 모른다. 또한 이는 우리의 인류애가, 인종과 종교, 이념을 차별하지 않음이 분명한 이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공통된 위협도 있지만, 어떻게 해야 적어도 우리를 서로 떼어 놓는 것들만큼은 더 기본적 가치가 있을지 성찰하게 하는 등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겪으면서 새로운 종류의 가톨릭 토론을 기대할 수 있다. 여전히 열정적이고, 이성과 신앙을 둘 다 강조하는 전통에 어울리지만, 더 관대하고 온정적이며,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않는 자세에 좀 더 가까워지는 그런 토론 말이다.

앞서 말했듯, 이는 아마도 그저 불가능한 꿈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격리봉쇄되어 있는데, 꿈꾸는 것 말고 또 할 게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기사 원문: https://cruxnow.com/news-analysis/2020/03/getting-a-jump-on-catholic-consequences-of-the-coronavi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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