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 박상훈 신부]

오늘부터 격주 화요일에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실린 글을 한 편씩 싣습니다. 사회사도직 현장에 몸담은 예수회원들이 나눈 노동, 인권, 평화, 환경 이야기를 통해 곳곳에 연대가 이어지길 바랍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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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과 인권

코로나19가 사람들의 일상을 순식간에 마비시켜 버렸다. 불안과 위기감이 삶의 자리 곳곳으로 스며들고,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도 늘어만 가고 있다. 폐쇄와 격리라는 낯선 말을 매일 들어야 하고 혐오와 배타의 심성은 곤두서고 있다. 집 밖으로 나가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한국은 메르스 사태 때 막대한 피해를 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긴급한 위기에 잘 대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이 재난은 위기 대응의 성과 여부와는 별개로, 우리 삶의 전반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무엇이 정말 중요하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오래된 질문이지만,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2000년대 들어 급증하는 감염병 유행은 자연적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번영과 폐해를 동시에 주는 세계화, 생산-소비 이념으로 무장한 초밀집 도시화, 기후변화와 끝없는 개발 충동으로 무너지는 생태환경의 위기를 빼놓을 수 없다. 코로나는 사회적 재난이며 사회체계의 문제다. 그동안 굳이 쳐다보려 하지 않거나 숨기려 했던 사회구조의 약점과 불균형이 이 재난을 거치며 드러나고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거나 뒤틀어 버리려는 욕구는 그리스도교의 용어로 말하면 본원적인 죄에 속한다. 눈먼 사람들의 치유 얘기가 복음서에 그리 자주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제는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는 의지’가 없는 경우인데, 알고 있는데도 보려고 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그것이 죄다. 의도적인 은폐는 현실을 왜곡하고 거짓의 삶으로 이어지며, 이 왜곡과 거짓의 실존적인 상태가 이기심이다.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도록 하는가? 크게 두 가지의 관습적인 태도의 잘못을 드러낸다. 재난을 자연의 변화 같은 불가항력의 원인으로 축소해 사회적 책임을 부인하는 것과 사회적 약자들이 훨씬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재난의 불평등함을 숨기는 것이다. 재난은 무엇보다 인간 존엄과 평등에 해를 끼친다. 다른 위기와 마찬가지로, 이 재난을 인권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명, 건강, 생존의 기본권을 향유하는 것이 인간의 충만한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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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가치의 최소치에 관한 것이다. 거기에는 언제나 ‘적어도’라는 한정사가 붙는다. 모든 사람이 적어도 이것은 요구할 수 있고, 또 모든 사람과 공적-사적 기구들은 적어도 그 요구에는 응답해야 하는 특정한 가치이다. 최소한이므로 인간이 지닌 모든 가치의 가장 바닥에 있는 초석이다. 무슨 위대한 정신이나 아름다운 영혼이 파악할 수 있는 심오함 같은 것이 아니다. 인권은 개인적인 것이든 제도적인 것이든, 인간의 가치를 지탱할 수 있는 가장 최소의 경계다.

누군가 삶을 위협하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힘 혹은 폭력에 직면할 때, 안전과 생존의 권리는 최소한의 방어막이 된다. 삶에 위협을 받는 정도는 사회적으로 모두 다르므로, 이 기본권의 보장과 증진이 특별히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이고 우선적이다. 그래서 인권학자 헨리 슈는 “기본권은 한계의 윤리”라고 말한다. 그 누구도 어떤 한계 아래로 추락하면 안 되는 임계선이다. 기본권이 있어야 다른 모든 권리도 향유할 수 있는 것이어서, 기본권을 희생해 다른 권리를 보장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한계를 지키지 않으면, 일상이나 재난이나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과도하게 일하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마치 아무 일 없는 듯이 바라보는, 세상에서 흔치 않은 충격적인 나라에 살고 있다. 작년에만 16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고 생의 절벽으로 몰려 자살한 이들은 만 명이 넘는데, 그때는 아무 일 없었던 양, 우리는 이 재난 앞에 함께 서 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재난이 불균등한 것처럼, 일상도 그런데 말이다. 원청-하청의 구조 문제를 개인이 떠안고, 마스크도 없이 일하다 집단감염 된 콜센터 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새벽에는 녹즙 배달을 했다고 한다. 손을 잘 씻고 이동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은 이제 감염 예방에 필수적인 수칙이 되었다. 그러나 손을 씻을 수도가 없고 혼자 있을 공간도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실제 전 세계에는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런 환경에서 살고 있다. 재난 이전에 이미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약자들이 있고, 이들은 보이지도 않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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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성경 전통에서 계시의 역사는 하느님께서 현실의 말을 듣고 고통받는 비참한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 ‘말씀’이 울음이 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현실과 묶이면서 현실의 핵심으로 들어간다. 현실이 말하고 울고,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도 말하고 운다.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말과 울음을 듣는 것이 참으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다. 이냐시오 엘라쿠리아는 우리가 보고 들어야 할 첫 번째 사람들로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 즉 희생자, 약자, 가난한 사람들을 꼽았다. 그들이 ‘말씀’이고 현실이다.

인권 언어에서도 그렇다. 인권은 태생부터 약자들을 위한 것이다. 모든 권리가 인권이 아니다. 인권침해로 고통받을 여지가 큰 사람들의 권리가 가장 잘 보호될 때만이 인간 권리의 소중한 가치가 드러난다. 짐작할 수 있듯이, 인권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인간을 인간 아니게 취급해서 막대한 이익을 얻는 사람들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구조(예컨대, 국가의 법체계)가 너무나도 강력하고 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 인권 역사는 불의와 비인간화에 맞선 지난한 투쟁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한 달 넘게 이어지는 어려운 시기에, 각지에서 달려와 질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수많은 보건의료 종사자들이 있고 용돈을 모아 대구로 보낸 광주의 어린 학생들이 있다. 반면에 혐오와 비방과 악질의 거짓으로 상처에 상처를 덧입히는 신천지 교단, 미래통합당, <조선일보>도 있다. 모든 인간 현실이 그렇듯, 여기서도 진실과 은폐, 책임감과 불의, 연대와 이기심이 서로 부딪히며 충돌하고 있다. 인권과 복음 모두에서 이 재난을 감당하는 첫걸음은 타인의 고통을 신실한 마음으로 함께 하고 연민과 비탄에 우리를 내어 놓는 것이다. 여기가 인권과 복음의 출발점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언젠가 끝나겠지만, 분명 이것이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발걸음도 마지막이 아니다.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

박상훈 신부(알렉산더)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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