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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죽은 자를 애도하는 법 

기사승인 2020.03.26  13:4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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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숙 수녀] 3월 29일(사순 제5주일) 에제 37,12ㄹ-14; 로마 8,8-11; 요한 11,1-45

‘애도’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자가 그를 추모하며 겪는 아픔의 방식이다. 애도의 슬픔 밑바닥엔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다는 절망이 깔려 있다. 사랑할수록 절망과 애도는 비례하고, 마침내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여만 하거나, 혹은 받아들일 수 없거나 한다. 이런 애도는 반드시 죽은 자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불가에서는 ‘생노병사’를 제외한 인간의 모든 ‘애별리(愛別離)’를 첫째가는 고통으로 여겼다. 그만큼 사랑하는 이와의 작별은 사별 못지않은 슬픔을 동반한다. 애도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하는 관계의 경계에서 일어난다. 애도가 잘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일이 성공해야 산 자는 제 삶으로 돌아올 수 있다. 문제는 떠남과 돌아옴의 경계인데, 이 경계에서 애도의 방식이 결정된다. 산자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올 것인지, 아니면 죽은 자를 붙들고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애도의 문제는 ‘죽음’이라는 실제가 닥치고 난 뒤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이별)을 예감하며, 언젠가 헤어질 것을 안다. 죽음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돼 평생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론적 문제다. 그래서 죽음과 함께 우리는 평생에 걸친 ‘애도’를 마음 한 켠에 두고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 사는 동안 만났던 모든 것, 모든 시간은 다 애틋하며, 가끔은 온 존재를 엄습해 오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죽음은 기실 인간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다. 

라자로는 예수가 사랑한 보기 드문 인물로 알려졌다. 복음은 예외적으로 곳곳에서 이 사실을 알린다.(요한 11,3.36) 예수는 그런 라자로가 죽어가고 있다는 기별을 받고 베타니아로 돌아오지만 그가 죽은 지 이미 수일이 지난 뒤였다. 장례를 끝낸 마리아와 마르타도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전하는 실제 관심은 라자로에 있기보다 라자로의 죽음을 둘러싸고 애도하는 사람들과 예수에 있다. 죽어가는 라자로를 살리고자 애타게 예수를 기다리던 마리아와 마르타, 이미 죽은 라자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관심이 쏠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다. 복음은 예수에 대한 이들의 관심이 잘못된 판단일 뿐 아니라 예측 역시 모두 빗나갔음을 전한다. 

사실 라자로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는 기대만큼의 애도가 보이지 않는다. 라자로의 죽음에 대한 예수의 인식은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는 데서 잘 드러난다. 라자로는 이미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슬픔에 빠질 이유가 없다. 마리아와 마르타는 죽은 라자로의 무덤을 배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까닭이다. 예수의 아버지 하느님은 죽은 자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의 아버지다.(요한 11,39-42 참조) 

애도.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렇다 해서 예수의 ‘애도’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예수는 인간이 겪는 가장 극심한 고통의 정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별과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가 사람으로 강생한 자체가 부정되는 것이며, 그를 기록한 인간 예수는 가짜이거나 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는 정반대에 서 있다. 그가 보인 일거수일투족에서 분출되는 강렬한 생명은 그가 느끼고 체득한 죽음의 정체에 대한 반증이다. 이런 사실은 왜 예수가 고난받는 종으로서 사순시기의 정점에 있는지를 알게 한다. 그는 고통받는 이들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긴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의 아버지에 대한 계시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심판관이 아님을 보여 준다. 더구나 그의 죽음과 부활이 영웅적이고 유아론적인 신을 입증함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신은 성경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위대하기만 한 신을 믿고 섬겨 온 사람들은 라자로의 죽음에 상심한 이들을 대하는 예수를 다시 바라보길 권한다.

다만 예수가 경계한 것은 애도가 죽은 자에게서 멈추는 일이다. 그가 죽음과 삶의 경계에 놓인 바위를 치우게 한 것도, 그 동굴에 빛을 들여보낸 것도 모두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자와 함께 떠도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예수의 애도에는 처음부터 절망적인 죽음 같은 것은 없었다. 그에게는 영원한 단절이라든가, 혹은 마르타의 “마지막 날, 다시 만날 때까지”(24)와 같은 삶과 죽음의 유예가 없다. 라자로의 부활은 라자로가 살아 있는 자들과의 연속성 안에서 계속 살아갈 것임을 알리는 사건이다. 

예수의 “부활과 생명”(25)은 예수 한 개인의 부활이 아니라 세계를 연결짓는 사건이다. 그는 우리로 ‘인해’ 죽고 부활한 첫 번째 사람으로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우선적 조건이게 한다. 그래서 그와 함께 바치는 애도에는 생명이 요동친다. 애도는 자신의 연민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힘이며, 사랑했던 이와의 관계와 시간들을 새로이 복구시키는 힘이다. 그러나 애도는 무엇보다 끝없는 나락으로 삶의 끈을 놓아버린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게 한다. 이것이 예수가 한 애도의 궁극적 방식이었다: 그가 ”큰 소리로 라자로를 불러내니, 죽었던 라자로가 걸어 나왔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주어 걸어가게 하여라.’”(43-44) 하자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그렇게 하였다. 우리가 해야 할 진정하고 궁극적인 애도는 예수처럼 하는 것이다. 이는 예수가 마르타에게 다짐한 “믿음”(25)의 근거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강신숙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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