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안태환]

신자유주의가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1970년대 말까지의 자본주의와 1980년대 이후의 그것은 서로 맥락이 다르다. 전자는 1930년대 초의 대공황 위기를 벗어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국가의 개입을 통해 복지 경제, 사회를 발전시킨 것이다. 후자를 신자유주의로 부른다. 전자와 후자 모두 약 40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흥미롭다. 현재 어떤 의미에서 다시 국가가 개입하고 노조와 정당 등이 각성하여 해결할 수 있는 지점을 이미 지난 것 같다. 

지구 전체가 정말로 어떤 전환점이 온 것 같다. 1970년대까지 산업화, 포디즘-테일러리즘 시대이고 규율사회다. 이에 비해 신자유주의 시대인 현재는 포스트포디즘, 네트워크, 생명정치, 자율성의 시대다. 네그리 등의 학자가 이렇게 주장한다. ‘네트워크’를 주목하는 것이 얼핏 서구와 라틴아메리카 사이에 서로 상응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맥락이 다르다. 전자는 비물질적 생산(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포디즘 시대와 다른)을 주로 하는 지식인과 다중이 네트워크의 중요한 주체다. 후자는 가난한 실업자 등의 비지식인이 ‘동네’를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가진다. 

1999년, 아르헨티나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사진 출처 = ommons.wikimedia.org)

자율주의 이론 등 서구의 최신 이론을 라틴아메리카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구체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미 전 세계적으로 실업과 임시직 취업(계약직, 알바 등)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상수가 되었고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를 불평등을 넘어 아예 투명인간 취급하는 상식적(?) ‘배제’에 대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다르게 대응하고 있다. 왜냐하면 라틴아메리카는 산업화에 성공하지 못해 정치-사회적 구조(국가와 시장)의 영향을 덜 받고 그 대신 대중의 사회적 생존을 위한 동네의 야성적(?) 네트워크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약자들이 서로 사회적 힘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맞서 싸울 국가와 시장은 다른 나라들처럼 강하지 않았으니 싸워 볼 만했다. 

우리 사회는 다른 경험을 했다. 그래서 아직 복지 경제 사회의 밑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고 있고 현재의 전환적 위기에 대한 대응도 잘 못하는 것 같다. 6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서 70년대 말까지 고속성장의 산업화를 했다. 그 산업화가 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압살한 것은 논외로 하고 이 경로는 80년대 이후에도 질주했다. 90년대 말에 IMF위기와 충돌할 때까지.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에 관한 많은 비판적 연구 성과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졌어도 그 반향이 우리에게는 약했던 것 같다.

라틴아메리카에서 90년대 초부터 더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장밋빛 약속과 함께 시작되었다. 물론 처음 몇 년간은 정치세력에 의한 달콤한 약속이 실현되는 듯했다. 그러나 곧 이 약속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고(대규모 파산과 실업), 이에 실업자들은 곧 집단적으로 저항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다. 달콤한 약속의 정치인은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이다. 

아르헨티나에서 90년대 초부터 새로운 사회운동, 즉 '피케테로스'라 불리는 실업자들에 의한 자본주의 비판과 대안적 사회운동이 동네와 길거리에서 네트워크 방식으로 출현했다. 시위의 직접적 원인은 대량해고에 대한 분노였다. 그러나 산발적 항의가 아니라 전국에 걸쳐 ‘조직’된 운동으로 나아갔다. 시위방식은 도로 점거였다. 주요 간선도로에서 타이어를 불태우며 각목을 들고 트럭의 통행을 막는 시위를 했다. 시위만 하지 않고 동네에 모여 주민총회를 통해 토론도 했다. 즉, 거리에 있으면 피케테로스 운동이고 동네로 돌아가면 주민총회운동이었다. 

이는 갑작스럽게 어느 소수의 지도에 의해 출현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대중의 불만과 함께 주민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그렇게 된 맥락은 어느 시위 참여자들에 대해 경찰이 불법화하고 탄압을 하면 같은 동네의 이웃주민들이 본능적으로 연대하는 성향 때문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실업자 운동에  무관심했다.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이 중요한 정치적 행위자로 출현했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상식적 사회구조(예를 들어, 정당과 노조 등)의 ‘바깥’에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위계서열상 맨 아래의 ‘루저’들이었다. 

2001년 피케테로스는 타이어를 태워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주요 출입구를 막았다. (이미지 출처 = Flickr)

90년대 중후반에는 실업자들이 고용 회복과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구를 통해 기존 ‘사회에의 재편입’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1997년의 시위에 대한 메넴정부의 대응방식은 지방정부를 통해 실업자들을 도시 재생사업 등에 참여시키며 경제적 지원을 하는 방식이었다. 즉, 시위자들을 국가가 포섭함으로써 사회운동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2001년 이후에 자신들이 사회 구조에서 철저히 배제된 것을 인식하고 마치 ‘가정’과 같은 일차원적 조직인 ‘동네’의 공동체적 연대의 네트워크를 통해 기존 체제를 변혁할 것을 토론한다. 즉 전반적 정치 경제의 구조적 변혁을 요구했다. 실업자들만이 아니라 동네에 같이 사는 중간 계급의 합류가 결정적이었다. 중간계급이 거리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시위를 한 뒤에 동네로 돌아가 자연스럽게 동네 이웃들과 토론을 함께했다. 

하지만 어떤 기존의 구체적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예: 마르크스주의 등)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 잡다한 세력이 모였고 굳이 공통점이 있다면 신자유주의 반대였다. 중요한 세력으로 페론주의(포퓰리즘) 세력이 있었다. 페론주의는 구미 강대국의 개입에 반대하는 것 외에 가난한 대중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잡다한 세력들 사이에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연대했다. 연대를 하게 된 동력은 자본주의와 ‘다른’ 그들의 삶의 방식이 구현되는 ‘동네’를 지키겠다는 기질 때문이었다. 구체적 사례로 ‘물물교환 운동’이 있었다. 이를 통해 주민총회운동이 더욱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다. 예를 들어, 2001년 12월에 물물교환 클럽 수가 1800개에서  2002년 3월에 약 5000개에 달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바자회 등 물물교환운동이 일어나긴 하지만 화폐의 개입이 없었다는 것이 다르다. 아르헨티나의 경우는 집 수리, 여행, 진료, 요리, 옷, 공예품, 정원 수리, 타롯, 마사지, 학생 과외, 대안 치료 등 매우 광범했고 가난과 실업이 개인적 이유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글로벌한 구조에서 온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중간계급이 하층대중과 연대했고 시정부도 이를 인정했다. 경쟁에서 패배한 개인들이 외롭지 않았다. 

200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한 물물교환운동. 이 운동에는 교환화폐가 개입했다. (사진 출처 = Flickr)

안태환(토마스)
한국외대, 대학원 스페인어과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사회학과, 콜롬비아 하베리아나대 중남미 문학박사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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