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주님 수난 성지 주일(4월 5일) 이사 50,4-7; 필리 2,6-11; 마태 26,14-27.66

성주간을 시작하며

교회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시작으로 성주간을 맞이합니다. 이 기간 전례는 주님의 부활을 앞두고 그분의 수난 여정과 죽음을 묵상하게끔 인도합니다. 교회는 성주간 속에서 두 번에 걸쳐 주님의 수난 여정을 전례 속에서 기억합니다. 이번 주 맞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는 각 해의 전례력에 맞게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이 봉독되고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요한 복음의 수난기가 선포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합니다. “왜 하느님의 아들께서 이러한 고통의 여정(Via dolorosa)을 체험하셔야 했나?” 그리스도교 신앙에 익숙한 사람들은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1코린 15,3-4)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을 언뜻 이해할 수 있으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입니다. 절대자인 신이 왜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말입니다. 그 의문은 대부분의 많은 사람에게 유효합니다. 

1독서에 등장하는 주님의 종 셋째 노래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 50,7) 역시 이 의문에 힘을 더합니다. 그리고 성주간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그리고 주님 수난 성금요일까지 만나게 될 주님의 종 노래들 역시 인간의 측면에서 이해할 수 없는 ‘순명’이 전면적인 주제로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입성 이후 예수는 수난당하고 죽으셨다.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왜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근원적인 방법은 바로 이 의문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해를 포기하고 그저 있는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궁극적인 답입니다. 인간의 차원을 벗어나는 주님의 삶에 인간의 잣대로 이해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행위가 될 수 있겠지요. 복음의 첫 순간부터 그러합니다. 하느님의 아들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부터가 크나큰 스캔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스캔들이 수많은 이단의 방법이 되었음을 우리는 요즘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방식 역시 이해를 포기한 순명이었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복음에서 전하는 주님의 인간적인 고뇌는 결국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순명으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성주간은 끊임없이 인간적인 이해를 넘어선 순명과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2독서에 등장하는 필리피서의 말씀처럼 말이지요.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 그리고 그 순종의 결과는 모든 이에 대한 구원으로 향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수난을 기념하게 되는 성금요일에 히브리서가 증언하는 바와 같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8) 그렇게 주님의 수난은 인간 차원의 이해를 포기하고 그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순명과 사랑을 배우게 되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기억의 차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글의 제목에 기억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바로 무덤입니다. 그 무덤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무덤을 통해 인간은 다른 인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애씁니다. 그리스어로 무덤을 뜻하는 ‘mnemeion’이 기억을 뜻하는 ‘mnemosynon’과 어원을 같이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인간의 무덤’에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인간이 만든 돌무덤을 거부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을 기억하는 제대로 된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수난의 여정 끝에서 다시 한번 주님을 제대로 기억하게 되는 방법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그분을 이해하고 기억하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많은 것이 제한되는 이번 성주간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성주간의 의미를 더욱더 깊이 묵상하게끔 하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하려기보다는 포기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게끔 만듭니다. 우리 주님에 대한 이해와 기억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으로 요즘 제가 자주 듣는 생활성가 한 곡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만나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이 잘 녹아 있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대로 사랑으로 다시 만나는 날을 기다립니다.

 

열일곱이다 -  그 사람을 위한 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그 사람 하는 일이 힘겨워도

언제나 활기차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소서

다른 사람의 맘에 사랑만 가득하게 채우도록

마음 따뜻한 사람으로 서 있게 지켜주소서

그리고 그 사람이 나를 볼 때에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제가 흔들림이 없도록 도와주소서

 

사랑이신 하느님 세상이 그 사람을 괴롭혀도

당신이 부여하신 큰 뜻 깨닫고 웃게 하소서

사람에 사로잡혀 가끔은 당신 보지 못할 때도

무심코 딛는 발걸음이 당신께 가게 하소서

그리고 그 사람 다시 만나는 날

서로 알아볼 수 있도록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있게 하소서

오 그대여 나는 사랑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죠

오 그대여 저의 기도가 들리시나요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부산교구 감물생태학습관 부관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