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위해 죽은 다음에야 부활은 온다

(크리스토퍼 조셉)

죽음은 요즘 주요한 화제다. 한 바이러스가 인종과 지위, 빈부, 귀천, 신앙 등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에 걸쳐 사람을 계속 죽이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럴 일이 없었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이미 6만 명 가까이 죽었다. 전문가들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 될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지금 이 부활절을 앞둔 시기에 죽음이 인간들을 노려보고 있다.

사상 처음으로 가톨릭 주교들은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즉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리는 연례 전례행사들에 참여하기 위해 교회에 가지 말라고 요청했다. 가톨릭 역사에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가톨릭교회는 박해와 재난, 전쟁, 전염병에 직면했을 때에도 자신의 신앙을 보전하고 기념하기 위해 맞서 왔다. 그래서 지금 이상한 질문이 하나 나온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하느님에 대한 믿음보다 더 강한가?

각 정부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여러 제한조치와 격리봉쇄를 실시했다. 이에 따라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모든 종교 집단은 기도 집회를 중지해야 했다. 가톨릭도 예외는 아니다. 일부 무모한 이들이 자신의 신앙을 위해 죽음에 도전할 태세이긴 하지만, 그들은 그 신앙이 뭔지 이해하지 못한다.

올해는 4월 5일이 성지주일이고 이로부터 수난 주간이 시작되는데, 이때의 성지주일 행렬은 대부분 교회에서는 다른 때와 달리 참여자가 별로 없는 행사가 될 것이다. 4월 12일의 부활대축일도 대부분 신자들에게는 우울하고 외로운 행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본당 사제들은 혼자서 신자들을 위한 수난 주간 전례를 봉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여기에는 가톨릭 신앙생활의 원천이자 정점인 성체성사가 제정된 성목요일 전례가 포함되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성금요일 미사도 포함된다. 이들 전례는 대중 없이 기념된다면 그저 한낱 예식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올해는 그렇게 될 것이다.

지난 몇 주간,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의 계명, 즉 주일 전례 참여의 의무(교회법 1246조)를 위반하도록 강요받았다. 다가오는 주에 또 어겨야 할 계명은 해마다 하는 고해성사와 영성체의 의무가 있다.

교회의 다섯 계명 가운데 하나에는 첫 영성체를 한 뒤의 모든 가톨릭 신자는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성체를 영할 의무가 있고, “연내 다른 시기에 수행할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이 계명은 부활 시기에 이행하여야 한다.(교회법 920조) 또한 교리교육에서는 영성체는 고해성사로써 준비한 뒤에 하도록 가르친다. 하지만 올해, 정부의 조치에 따라 신자들은 이를 저버릴 수밖에 없게 됐다.

3월 28일, 이탈리아 산 주세페 성당 안에서 돈 마르첼리노 신부가 코로나로 죽은 신자들을 축복하고 있다. (사진 출처 = UCANEWS)

가톨릭교회는 2000년의 역사를 가진바, 예상치 못했던 일에 어떻게 대처할지 시스템들을 갖춘 조직이다. 설사 전에는 인간을 공격한 적이 한 번도 없던 바이러스로 생긴 이처럼 심각한 상황이라고 해도 말이다. 예를 들어, 주교들에게는 (각자의 관할 구역에 대해) 비상 시기에 사목적으로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의무들을 해제하는 교령을 발표할 권한이 있다. 주교 대부분은 이미 그리하였고, 대신에 신자들이 각자의 집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수난 신비를 기념할지를 설명했다.

주교들은 지금 다른 선택지가 없다. 인도가 한 사례인데, 인도에서는 오는 4월 15일까지 전국 격리봉쇄 조치가 실행된 상태다. 연방정부는 이 기간에는 “모든 예배 장소가 대중의 출입이 금지된다. 어떠한 종교 집회도, 예외 없이, 허가되지 않는다.”고 명령했다. 위반자는 형사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아주 명확히 밝혔다. 유럽, 영국,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시아 대부분 국가에서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국가를 따를 것인가, 신앙을 따를 것인가? 하느님과 인간, 누구에게 순종할 것인가?

가톨릭인들의 사회연결망에서는 이런 식의 많은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질문과 답변 대부분은 이런 질문들 자체만큼이나 너무 단순하고 미성숙한 것들이다. 이런 주제넘은 토론들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인간을 위한 사랑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불쌍할 지경이다. 네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나머지 가르침은 모두 이 사랑을 보완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간단히 말해, 인간에게 해로움을 초래하는 예배는 그리스도교 예배가 아니다. 그러한 예배를 피하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행위다.

어떤 이들에게는 해마다 해야 하는 의무적 고해성사를 빠트리는 것보다 고해성사를 하지 못한 채 죽을 것이라는 전망이 더 큰 걱정이 된다. 한 할머니는 내게 부활 판공을 받아야 코로나19로 죽을 준비를 할 수 있는데라고 눈물 어린 눈으로 말했다. 가톨릭 공동체들은 그간 수난 주간에 영성체와 고해성사를 피하도록 하는 가능성에 대해 전혀 생각을 해 봄도 없이 세세대대를 이어 신자들이 영적으로 미성숙한 상태에서 자라고 죽도록 놔둬 왔다.

가톨릭인들은, 다른 종교인과 마찬가지로, 종교와 영성이 서로 분리된 채 존재할 수 있음을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종교와 영성을 혼동하고 있다. 심지어 교황과 주교들이 신자들에게 이 부활시기에 (사제에게 갈 수 없으면, 고해 사제 없이 직접 하느님께 드리는) “개인적 고해성사”(personal confession)가 가능하고 또한 유효하다고 말했음에도 그것을 믿지 않는 신자들이 많다. 교회는 예식들을 은총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불가해한 영적 미성숙성을 지니고 있다. (참고 기사: https://cruxnow.com/vatican/2020/03/if-you-cant-go-to-confession-take-your-sorrow-directly-to-god-pope-says/)

지금 이 죽음의 시기에 교회들은 닫혀 있고 사제들은 만날 수 없다. 그렇다면 사제와 교회는 잉여가 되는 것인가? 어느 정도는 그런 걱정은 맞는 말이다. 참으로, 사제와 교회가 지금처럼 성사의 분배에 필요한 요소로서만 존재한다면 이들은 불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어느 시점엔가, 사목자들은 사제직이란 단지 성사 집전을 넘어선 것이며 성사들의 유효성은 사제들이 하는 예식들이 아니라 (신자들의) 그리스도인다운 삶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교회와 그 사제직의 의미는 삶을 자신의 공동체와 나눈다는 자세의 총체성이다. 공동체가 없다면 교회와 사제직은 무의미해진다. 모든 세례 받은 가톨릭 신자는 그리스도의 이 나눔의 희생에 참여할 소명이 있다. 공동체를 위해 몸이 바숴지고 피를 흘리면서 말이다.

우리가 주일마다 기념하는 것은 삶이든 죽음이든 두려워함 없이 부활을 기념하라는 요청이다. 아마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전염병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비 성직자화된 교회를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면 교회들은 잉여가 되는가? 모든 종교적 건물들은, 성당들뿐 아니라, 신앙에 필요한 물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회학적으로 유용한 필수품의 의미가 더 크다. 건물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장하여 “성령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는 성숙함에 이르도록 도우는 데 필요할 수 있다. 한 사회 안에 있는 종교 건물들이 얼마나 많고 또 호화로운가를 보면 그 사회 안에서 그 종교가 차지하는 사회경제적 영향력을 알 수 있다. 그런 건물들은 신앙의 깊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전혀 안 한다. 이 전염병을 겪으면서 우리는 우리가 영성의 이름으로 창조해 낸 이런 호화로운 쓰레기를 이해할 기회를 얻고 있다.

죽음의 전망은 우리에게 실제다. 바로 지금뿐 아니라, 늘 그래 왔다. 그 공포는 코로나19 때문에 아무도 나를 돌보는 이 없이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다. 어쩌면 거리에서 그럴 수도 있고. 하지만 인간은 언제나, 거리에서 돌보는 이 없는 상태에서 태어나고, 살고, 죽어 왔다. 보기를 들자면, 코로나 때문이든 다른 이유든, 델리의 길거리에서는 날마다 10명이 죽는다. 부활은 죽음 뒤에 온다. 오직 죽은 다음에 온다.

(크리스토퍼 조셉은 인도 언론인으로 <아시아가톨릭뉴스>에서 일하고 있다.)

기사 원문: https://www.ucanews.com/news/fear-of-death-in-the-season-of-resurrection/87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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