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오세일]

전 세계는 요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혼란과 마비를 겪고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은 우리의 일상과 문화를 뿌리째 흔들고 있지요. 무증상 감염을 일으키는 낯설고 생소한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학교와 교회가 문을 닫고 스포츠 경기, 콘서트 등 집단 모임이 모두 중지되고, 전쟁지역마저도 휴전을 선언하고, 일상생활과 사회적 관행들이 서서히 마비되어 가는 총성 없는 전쟁이 전 세계적으로 한창 진행 중입니다. 과학과 기술, 경제와 자본에 기대어 오로지 ‘물질적 번영’만을 지상 최고의 가치인 양 맹신하던 인류사회가 그토록 작고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앞에서 이토록 취약하고 불안해지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었던가요?

이렇게 인류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코로나 전시상황 속에서 과연 총선을 온전히 치룰 수 있을지 전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하고 있다고 합니다. “웬 놈의 비례정당은 왜 이렇게 많아!” “조국이나 윤석렬이나, 힘 꽤나 쓰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 다들 자기 식구 먼저 챙기는 판에, 선거는 무슨~” “어차피 선거판은 기득권 정치세력들끼리 자기들의 이권과 당리당략에 묶여 경쟁하는 싸움판 아닌가요?” .... 기실 우리에게는 정치를 불신하고 냉소주의에 빠져도 될 만한 이유가 충분히 많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취향과 감정, 나만의 생각과 판단에서 잠시 벗어나서, 보다 넓게 세계적인 안목으로 그리고 보다 길게 역사적인 관점에서 우리 함께 ‘오늘날 지금 이 자리에서 진행되는’ 선거의 의미를 성찰해 봅시다.

역사의식과 공동선

민주주의 제도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부터 존재했지만 당시에는 소수의 특권층 시민들에게만 표결의 권리가 보장되었고, 여성과 외국인, 청소년들은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이후 프랑스 혁명을 통해서 구체제 특권층의 삼부회의가 무너졌고, 미국에서도 오랜 투쟁의 결과로 여성과 흑인들이 투표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갈등과 투쟁’ 안에서 발전되어 왔고, 독재자들은 권력의 향배를 결정하는 선거제도의 통제를 통해서 ‘권력을 향한 집단적 의지’를 관철하여 힘없는 시민들의 권리를 배제하고 소외된 시민들의 절박한 외침을 무력화해 오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87년 민주화항쟁, 촛불혁명과 미투혁명을 거치며 우리 국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성숙하고 견고한 시민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제도 정치뿐 아니라 일상 정치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통해서 제도의 ‘공정성’ 문제뿐 아니라 일상의 ‘꼰대 갑질’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목소리) 작은 이들의 권리와 외침’을 귀 기울여 듣고 정치 제도와 사회 구조를 개선하고자 하는 시대정신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핵심(알맹이 정신)으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구체제의 특권적이며 폐쇄적인 질서에 도전하며 ‘힘없는 이들이 보다 더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전진의 여정’이란 점에서 역사의식은 본질적으로 ‘진보적’입니다. 역사의식은 소수 기득권자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정당화하는 ‘특권의 옹호’가 아니라 국가 공동체의 공익과 공동선을 지향하는 국민 다수의 선한 의지, 특별히 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분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지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때 비로소 '실질적인 민주주의'에 닻을 내릴 수 있습니다.

2020년 21대 국회의원 선거일은 4월 15일이다. ⓒ김수나 기자

한일전 같은 총선?

대한민국 근현대 역사의 관점에서 2020년 총선은 마치도 ‘한일전’과 같은 커다란 긴장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촛불 혁명 이후 맞불 시위가 지속되어 온 가운데, 실제로 한일 두 국가 간에 무역 전쟁은 코로나 외교갈등으로 치닫기도 했지요. 우리 사회에서 드러나는 촛불과 맞불 갈등의 역사적 원인은 ‘친일 부역에 대한 재판’을 방기하고 반민특위를 무력화했던 '공적 책무성의 부재'에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그 사이에 친일부역자들은 지식인이나 행정관료로서 기득권의 위치를 선점하고, 해방 후 신탁·반탁의 대립과 한국전쟁의 격동기를 겪으며 친미 반공주의라는 냉전 국가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실상 파워엘리트로 군림할 수 있었지요. 요컨대, 일제시대 이래로 계속된 얼룩지고 왜곡된 우리의 정치문화를 시민 주권의 이름으로 새롭게 개편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이번 총선에서 우리는 재인식하게 됩니다.

우리 시대 특권층에는 아직도 조부모나 부모가 일제시절 상당한 특혜와 기득권을 누리던 친일 집안의 자손들이 제법 많지요? 이제는 그런 특혜 집단, 특권 집안에서 정치인으로 나서는 이들이 자기의 특권적 뿌리와 과오에 대해 뉘우치고 환골탈태하지 않고 선거판에 나올 경우 시민 주권으로 내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직도 고위 공직자로서 특권을 남용하거나 집안 식구에게 특혜를 몰아주는 이들은 ‘공수처 제도’를 통해서 누구든 조사할 수 있는 새 시대가 도래해야 하지 않을까요?

친미, 반공 이념을 무기 삼아, 한일 간 갈등 속에서 민족의 자주적 역량과 국권을 무시하고 ‘우리 일본’을 앞세우고 ‘일본에 사과한다’고 외치던 '일제강점기 시대의 신민(臣民)의식'을 가진 정치인들의 행태는 국민 주권의 이름으로 선거를 통해서 심판해야 합니다.

한편 촛불혁명 이후 검찰개혁의 역사적 정당성은 바로 일제 식민지 치하 때부터 무소불위의 기득권 세력으로 군림해 온 ‘검찰권력의 만용’을 뿌리 뽑는 데 있습니다. 일제 총독부에 저항하던 시민들을 붙잡아가 약식서류로 수사와 기소를 독점하던 식민지 시대 검찰의 낡은 관행은 오늘날 ‘선택적 수사’와 ‘검언 유착’, ‘제 식구 봐주기’ 같은 불신의 온상이 되어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념적 선동과 혐오를 넘어서....

우리는 그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모진 산업화 시대를 겪으며 “경제 발전”이라는 국가적 사명만이 최우선시되는 동안, 국가권력의 파행에 대해서 비판하는 모든 시민을 좌경, 용공, 빨갱이로 낙인 찍어 투옥하고 억압하던 걸 목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폭압적인 정치문화를 정당화하던 관변언론들은 어느새 막대한 ‘언론권력’으로 자리잡았고, 선량한 기성세대 시민들은 그들의 이념적 선동과 반공 논리에 수십 년 동안 길들어져 살아왔었습니다. 한편,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과 인터넷, SNS와 유튜브, 종편 뉴스들이 쏟아내는 정보의 홍수 속에 새롭게 적응하며 살고 있지만, 실상 우리 기성세대는 그간 국가가 주입해 놓은 정치적 입맛과 취향에만 길들어져서 ‘편향된 정보의 쳇바퀴’에 감옥처럼 갇혀 살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가짜뉴스를 만들고 유포하는 ‘거짓된 선동자’들을 식별해 내는 올바른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거짓된 선동자들은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현실이 아니라 특정한 하나의 현상만을 부각시키고 과장해서 혐오감을 일으키고 ‘집단적 불안감’에 호소합니다. 자신들의 언행일치 여부는 뒤돌아보지 않고 상대방의 흠집 캐기로 오로지 공격과 비난만 합니다. 겉으로는 국민 혹은 공동체 전체를 위하는 척 생색내지만, 본인의 기득권 유지와 명예욕만이 최우선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편향성을 가지고 불공정한 보도를 일삼는 부패한 언론권력, 이념적 선동만을 일삼는 가짜뉴스를 식별하고 대한민국의 주권자로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성숙하고 당당한 비판력이 필요합니다.

보다 더 건강한 사회 시스템을 향하여....

전 세계는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전쟁으로 감염자와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일상도 경제도 모두 마비가 되고 있고, 이는 ‘대공황’의 예후가 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라고들 합니다. 그 어떤 시장의 논리로 국가 경제의 민생을 구제하는 길은 사실상 요원합니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서구 선진국(소위 자본주의 제1세계 국가) 마저 코로나 위기 상황에 미흡하게 대처하다가 엄청난 국가적 재난을 겪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국가에서 시민들의 이동 제한을 강제하고 있으며, 영국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5G 통신사 기지국을 통해서 전파될 수 있다는 황당한 가짜뉴스에 흥분한 시민들이 기지국을 불태우는 웃픈 사태까지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의료보험 체계가 사설화된 미국과 수준 낮은 공공의료보험을 제공해 왔던 영국은 가슴 아프게도 ‘자본주의 사회의 안타까운 민낯’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천지 감염자들로 인해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었던 대한민국의 국가적 방역 시스템을 이제 전 세계가 칭찬하고 따라 배우려 서로 앞다투고 있다는 뉴스를 매일 접하며 우리의 국격을 새롭게 실감하게 됩니다.

좋은 사회의 요건은 공적 책무성과 투명성에 담겨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 아무리 사적 소유권과 사적 권리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국가적 위기 시에는 보다 더 투명하고 보다 더 큰 공적, 제도적 책무성을 갖고 국민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서 기능하는 사회 시스템이 필요하고, 아울러 그에 합당하게 일할 수 있는 공적 봉사자(civil servant)들이 필요합니다! 2014년 세월호 침몰 당시 국가안전 시스템을 방치하고 시장경제를 통해 재난 마저도 사설화(privatizaton: 민영화는 정치적 ‘꼼수’ 표현임)함으로써 공적 책무성을 무시했고, 2016년 메르스가 S병원에서 증폭했을 때, 사생활 정보 보호를 구실로 공적 책무성을 또 다시 방치함으로서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 했던 이들이 다시 정권을 쥐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이제 코로나 전선에서 그토록 헌신하시는 분들과 같은 마음으로, 국가와 지역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해서 아낌없이 헌신할 수 있는 공적 봉사자들이 국회의 일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욱이 우리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와 청년 세대가 보다 더 안전하고 행복한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전진시킬 수 있는 비젼을 품고 시민의 주권을 아름답게 실천하러 나가야 합니다. 

오세일

예수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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