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엄기호] "나, 조선소 노동자",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코난북스, 2019

글이 길어 두 번에 나눠서 게재한다. 첫 번째에서는 이번 선거의 의미와 책 읽는 것과 교양의 의미, 그리고 이 둘이 합쳐서 왜 이번 선거와 같은 결과를 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에서는 반대로 그런 교양을 쌓는 이들이 어떤 함정에 빠질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왜 이 책 "나, 조선소 노동자"를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지난 편에서 나는 말 없음의 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선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책 읽는 것의 첫 번째 성취다. 이번에는 반대를 보려고 한다. 책을 읽는 자이기 때문에 범할 수 있는 치명적인 잘못과 함정 말이다. 나는 이 함정을 피하고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이 주는 두 번째이자 더 값진 선물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나, 조선소 노동자"를 읽어야 한다고 본다. 말-아님의 두 번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에서는 교양 있음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이자 악랄한 실수가 여기서 발생한다. 

이 책이 놀라운 이유는 바로, 어떤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어떻게 말의 세계에서 삽시간에 배제되어 버렸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우리와 같이 말하던, 우리처럼 말하던 사람들이 오늘 갑자기 우리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들의 말이 소리 지름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 그에 대한 기록이다.  

“근데 그 따위로 이야기를 해요. 담배 끊어버렸어요. 얼마나 화가 났으면 30년 피운 담배를 끊었겠어요?” 사고를 당한 다음 진영민 씨가 삼성 사장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의 말은 말로 들리지도 않은 것이다. 나는 말을 했는데, 내 말을 말로 들어 주지 않았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그래서 그는 그의 인간됨-말할 수 있음이라는 존엄을 드러낸다. 담배를 끊어버림으로써 말이다.  

이 책이 대단한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저 이들이 얼마나 처참하고 비참한가를 드러내지 않는다. 여기에 등장하는 분들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기록과 책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분들은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을 때마다 나는 말하는 자임을 선포한다. 내가 말하는 자임을, 내가 지금 들리지 않음에 분노하고 있음을 스스로의 몸을 통해 증명한다. 30년 피던 담배를 끊는 것을 통해 그저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분노하는 것은 너가 내 말을 말로 듣지 않았다는 것, 그것에 항의하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이 말하는 존재로서, 정확하게 말하면 들려야 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의 존엄을 실현하는 가장 위대한 저항이다. 뒤에서 다시 더 강조하겠지만 이 책은 비참에 대한 책이 아니라 존엄에 대한 책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다시 강조하지만 한국 출판계의 ‘뜻밖의 소식’이다. 

"나, 조선소 노동자",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코난북스, 2019. (표지 출처 = 코난북스)

책의 곳곳에서 사고 이후 당사자들이 경험하는 것이 말하는 존재로서의 부정이다. 보험기관에 갔던 김명진(가명) 씨는 이런 말을 듣는다. “어렵게 이야기해서 포기하게끔 해요. 트라우마되냐고 물어봤을 때 담당자가 ‘천 명 중의 한 명인데 니가 증명해야지’ 그런식으로 이야기하더라고요.” 이 말에 대해 김명진 씨는 이 경험에 대해 “우리가 질문했는데 도로 우리에게 질문하는 그런 개념이기에”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도 놀라울 정도로 트라우마를 당해 말을 잃은 자가 아니라 트라우마를 당한 사람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는 사회에 대해 판단하고 질문하는 자 – 즉 진짜 말을 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부분에서 이 책은 말-할 수 없음과 말-들을 수 없음을 완전히 전복한다. 누가 말하지 못하는가. 그들인가? 아니다. 그들은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말을 하고 있고, 말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질문이라는 최고의 말을 하고 있다. 더구나 이 사례에서도 보듯 이들은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최대한 국가의 말을, 제도의 말을 하려고 노력한다. 사고를 당하지 않은 이들의 말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위에서 말한 대로라면 교양의 최고봉인 나의 말이 아닌 너의 말로 하기를 서투르게 끊임없이 실천하고 실현하려고 한다. 다만 응답이 없다. “우리가 질문하는데” 도로 “우리에게 질문해서” 말문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말하는 존재로서 자기의 존엄을 지키려고하는 사람은 말문을 닫아버린다. 김명진 씨는 “혼자라는 생각이 되게 강해진 것 같아요.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해요”라고 말한다. 집에서부터 회사, 보험, 그리고 지역 사회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결국 도달하게 되는 것은 자신은 혼자라는 막다른 골목이다. 말을 하고 말을 하려는 존재가 스스로의 말에 대해 생각하는 고독이 아니라 외로움에 봉착한다. 존엄을 지키기 위해 모든 ‘사이’가 파괴된다.  

이 책에서 김종배 씨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딸’ 이렇게 부르고 말았어요. 답답했어요. 그 후로도 뭔가 잊어버리는 게 반복됐어요. 사람 이름, 회사 이름, 시간 같은것도 다 잊어버리고 ‘병원에 무슨 요일 몇 시에 오세요’ 하면 아침까지만 해도 오늘 오후 병원 가는 날이라고 해놓고 잊어버리고 안 가고 늦게 가고 그랬어요. 계산도 안 되지, 사고 전에 비해 가지고 지금도 많이 멍청해져 있어요.” 사이가 파괴되니, 이 세계는 사막이 된다. 이렇게 모든 ‘사이’가 파괴된 존재가 존엄할 수 있는가? 결국 존엄을 지키려는 자의 존엄을 파괴하는 것, 그것이 이 야만의 세계인 것이 아닌가?  

이것이 첫 번째로 내가 그리스도인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 이유다. 이들의 비참에 주목하자는 것도, 사회적 고통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만도 아니다. 누가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누가 이들의 말에 응답할 것인가다. 당연히 누구보다 정신건강의학과, 산업재해 담당자, 노동운동가, 이런 분들이 응답을 해야 하고, 그런 분들이 응답할 수 있는 제도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굳이 이 책을 그리스도인들이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에게 외치며 말을 시작한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말이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더욱더 크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외친다. 그러자 예수는 그를 데리고 오라고 한다. 그들은 그에게 다가가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라고 말한다. 예수는 그에게 무엇을 바라냐고 묻는다. 그는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말하고 예수는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한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고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서게 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은 문화이론적으로 본다면 기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가 말하고, 누가 듣고, 누가 응답하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마르코 복음에는 이 눈먼 자와 같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대부분 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귀신 들린 자들’이다. 나는 이 ‘귀신 들린 자들’이라는 말이 역설적인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진짜 귀신 들렸다는 말이라기보다는 그들의 말을 들을 줄 모르고, 그들의 말로 말하기를 두려워하여 시도하지 않던 자들이 그들을 ‘귀신 들린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귀신 들린 자들’의 말을 알아듣고, 그들에게 말을 거는 이가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그들을 당신의 제자 무리들에 따라오게 하는 분이 계시다. 예수다. 

위의 눈먼 자가 한 것처럼 그들에게 당신 제자의 무리에 따라오게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말을 돌려준 것이고, 말하는 자가 됨으로써 그들이 제자들 사이에 집을 짓게 하는 것, 즉 세계를 돌려준 것이 아닌가. 세계의 바깥에 있던 자에게 세계를 돌려준 것, 이것은 세계 ‘끝’까지 말을 전하라는 복음 전파의 명령은 이미 그 시대부터 실천되고 실현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끝’은 여기에 있다. 듣지 못하고, 그것이 혹 귀신 붙은 것이 아닌가 싶어 따라하기를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트라우마의 당사자들은 바르티매오처럼 끊임없이 소리를 친다. “나 여기 있소”, “나는 이런 일을 당했소” 그렇기에 “나는 이 시대의 증언자요” 그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오”, “나를 치료하시오”라고 말이다. 고작 우리는 여기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오. 나를 치료하시오”나 들으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는 분명하게 말한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이다. 그는 귀신 들린 자가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 ‘말하는 자’다. 이 책이 작년 출판에서 유례없이 뜻밖의 소식인 이유는 이들이 “불쌍히 여기시오”, “나를 치료하시오”라고 말하게 하는 그 비참과 사회적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드러내면서 동시에 이들이 “믿음이 있는자”라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기록문학의 놀라운 성취다. 

여기에서 사회적 고통에 의해 비참을 경험하며, 존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존엄이 파괴되어 가는 사람들, 이들의 이야기인 이 책을 그리스도인이 읽어야 할 두 번째 이유가 나온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들의 이야기는 그날 이후의 비참에 머무르고, 그날 이후 자신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날이 있었기에 그들이 다시 바라보게 된 그날 이전의 ‘아름다움’, 그를 통해 도달한 인간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어떤 것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보편적 이해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도달해야 하는,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좋은 삶, 그래서 한 명도 빠짐없이 누구나 그 좋은 삶에 도달했을 때 펼쳐지는 세계,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시간을 나누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흔히 우리는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나누지 않는다. 우리가 기원전, 기원후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이렇게 나눈다. 예수님 이전, 예수님 이후. 그리고 완세로 말이다. 문화이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시간을 본다는 것을 말한다. 사건의 이후가 있고, 그 이후의 이전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완성되면 이후의 이후가 있다. 즉 시간이란 이후와 이후의 이전, 그리고 이후의 이후라고 나뉜다.                      

이 책이 성취한 놀라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적 고통을 다루는 책들은 보통 그날 ‘이후’만을 다룬다. 그날 ‘이후’만을 다루기 때문에 사회적 고통과 비참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피해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이며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입장들은 여기서 힘겹게 한 걸음 더 나가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이후’에 매여 있다. 그렇기에 책을 읽는 이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오”라는 말만 들린다. 그 이후의 이후에 대해서(바르티매오의 이야기라면 눈을 뜨고 난 다음 예수의 무리를 따라가고 난 다음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후의 이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이후를 겪은 이들이 이후로 인해 이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고, 이전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귀여겨듣는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 이후의 이후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를 통해 이들이 도달하게 되는 이전의 이야기는 누구나 도달해야 하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를 통해서 우리는 ‘이후의 이후’에 대해 비로소 논의하게 된다. 

책을 통해 보자. 사고를 당하기 전 김석진 씨는 일을 하며 형들이 자기를 되게 귀여워해 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나이가 많음에도 그들은 ‘형’들이었다. 그리고 기술을 가진 ‘이모’들이 있다. 이들과의 ‘사이’가 있다. 일 끝나고 형들과 낚시도 다닌다. 여행을 다녀오면 이모들에게 화장품도 사다 드리고 한다. 즐거운 인생이다. 그러다 그는 욕심이 난다. 그들과 함께 돈을 더 벌고 싶어진다. 조선소에서는 옮겨야 돈이 오른다. 그래서 똑똑한 그는 자기를 이뻐하고 자기도 챙기고 싶어한 이모들을 데리고 팀을 옮긴다. 그리고 사고가 났다. 사고 이후 이모들을 만났을 때 그는 이모들이 자기를 원망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거만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모들에게 들은 원망 중에는 “어린 놈이 건방을 떨더니 이런 꼴 날 줄 알았다”는 말이 있다. 더 많은 돈을 벌어 이모들도 기쁘게 하고 자기도 더 즐거운 삶을 살려고 했던 것, 그것이 희망이 아니라 환상이며 바로 그 사고를 불러오게 된 이유(오해하지 마시라. 원망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게 되어 그는 당연히 이모들에게 너무 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환상은 그날 ‘이후’ 악몽이 되어 김석진 씨를 덮친다. 고등학교때 만났던 사람들과도 단절된다. 

그런데 김석진 씨는 이 인터뷰의 끝부분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한다. 사고 이후 자기가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환상이며, 그 환상이 부서지며 같이 자기의 세계가 부서져 있는 상태에서 그가 사고의 이전에 피렌체를 여행했던 것에 대해 문득 이야기한다. 이후를 통해 가장 간절하게 돌아보게 된 이전은 돈 많이 벌던 것이 아니라 여행이었다. “조선소에서 돈 모아서 유렵 여행을 갔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피렌체예요. 두오모 성당이 되게 유명하거든요. 노을 질 때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다 주황색이에요. 성당 위에 올라가서 노을 질 때까지 기다렸어요. 하늘도 주황색, 지붕들도 주황색, 정말 아름다웠어요. 원래 이틀만 있으려고 했는데 일주일을 있었어요. 매일 저녁 올라가서 노을을 봤어요. 지금도 눈 감으면 그 장면이 생각나요. 그리워요.” 

그가 본 그 주황색의 세계, 그는 정말 아름다웠다고 말한다. 빛나는 세계다. 그러나 그냥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매일 올라가서 볼 정도로, 압도적인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차별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가. 우리는 이렇게 어떤 사건을 겪고 나면 그 사고의 이전에서 하느님나라를 보게 된다. 이후만이 간절하게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후의 이전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이다. 그리고 그 빛나는 삶은 나만의 경험이지만 동시에 모든 인간이 경험하기를 바라는, 사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좋은 삶’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다. 역설적으로 말이다. 이건 고통을 겪는 모든 이가 그러하다. 사건이 있고 나면, 그때서야 비로소 그 이전에는 몰랐던 이미 존재했던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하게 된다.

김석진 씨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이 이후의 이전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다시 가장 아름답고 빛났던 순간을 떠올린다. 김명진 씨는 “이 일이 힘들어서 못하겠다, 이런 것보다는.... 잘하고 있다는 뿌듯함을 줬고요. 애도 좋은 거 사 입히고 먹이고, 사 달라는 것 다 사 줬어요. 그런거에 뿌듯하다고 해야 하나?”라고 말한다. 돈이 준 환상이라 돈 때문에 깨어지게 되는 환상이지만 거기서 그는 빛나는 존재고 그것은 누구나 누려야 하는 ‘좋은 삶’이다. 누구나 그렇게 빛나는 삶을 누려야 한다. 차별 없이. 

예수가 바르티매오에게 묻는다. 무엇을 원하냐고 말이다. 그는 대답한다. 보기를 원한다고. 그가 이전에 볼 수 있었던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듣기만 하며 간절하게 바란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누구나 떠올릴 것이다. 헬렌 켈러 말이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서 그는 간절히 말하지 않는가. 첫날은 친구들과 동물들, 두 번째 날은 자연, 그것도 무엇보다 밤이 낮으로 바뀌는 ‘기적’, 그리고 마지막 날은 분주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보고 싶다고 말한다. 이보다 더 바르티매오가 원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할 다른 말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삶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누구나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것도 좋은 삶 말이다. 이후의 이전을 통해 이들은 바르티매오의 간절함에 닿은 사람이다.

예수는 그에게 말한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문화이론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이 말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다. 여기서 예수님은 바르티매오를 눈먼 자, 그래서 다른 군중들이 외친 것처럼 조용히 해야 하는 자가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다. 믿음이 있는 자이기에 그는 조용히 해야 하는 자가 아니라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를 부르신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믿음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그리고 바르티매오는 예수의 무리를 따라간다. 이후의 이후를 살아가게 된다. 이후의 이전의 빛나는 삶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삶이 모두에게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모두가 살아야 할 ‘좋은 삶’을 이후의 이후의 삶으로 생각하고 싸운다. 

박철희 씨는 말한다. “내가 당하고 보니 다 이해되죠. 나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텐데 그 사람들이 외롭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워요. 그런 사람을 위해서 말 한마디라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에게 그런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그는 동생을 잃었다. 그는 잃어버린 동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한테 동생은 영원히 마흔다섯 살이구나. 내가 팔십이 돼도 동생은 여전히 마흔다섯이겠지요.” 그에게 동생은 형제이자 친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 또한 사고를 당했고 아픔이 있기에 자기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말을 한마디라도 건네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들이 모두 영원히 마흔다섯인 자신의 친구이자 동생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이전에 대한 기억이 이후의 이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했기에 그는 지금 싸우고 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선거 이후, 꼭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귀신 들린 자들의 말로 축출하고 우리의 말로 바벨탑을 쌓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것처럼 귀신 들린 자들의 말을 알아듣고(귀신의 말이 아니다)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이후의 이후를 살아가게 한 예수의 뒤를 따르려고 한다면, 사람이 되시어 우리 사이에 거하는 말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집을 짓고 세계를 만들려고 한다면, 이 모든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아침이슬과 같이 허무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하느님은 그 존재하는 것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바벨탑을 쌓는 책 읽기를 그만두고 이 책을 읽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엄기호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단속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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