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고용석]

인류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과 다가올 기후위기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지구상의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주며 그 결과가 이 행성에 공존하는 모든 생명체의 평화로운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값비싼 교훈을 일깨운다. 아이들도 요즘 배우는 것이 지정학이 아닌 범지구적 생물권 정치다. 스웨덴 청소년 그레타 툰베리로부터 시작된 ‘기후 학교파업 시위’ 등 아이들은 존재의 모든 순간과 일상에서 매일 하는 모든 일이 타인의 삶과 다른 창조물, 생태계와 지구의 영역에 극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사실 코로나19의 창궐과 기후비상사태는 우리가 자연과 생명에 저지른 폭력의 부메랑이자 자연과 생명의 경고다. 

첫째. 21세기 초반에 새롭게 나타나거나 재발한 인간 질병의 75퍼센트 이상도 동물이나 동물성 식품에서 유래된 병원체가 원인인 인수 공통 전염병이다. 설사 코로나19의 백신이나 치료제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다른 형태의 전염병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고 그 주기는 점점 더 짧아질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글로벌 경제와 인류의 삶을 위협할 상수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둘째. 다가올 기후위기가 초래할 붕괴와 혼란에 비하면 코로나19는 예고편이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기후변화에 대한 자연의 응답 중 하나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기후변화는 인간활동으로 인해 생겨난다. 지구 역사를 1년으로 환산하면 인류는 새해 15분 전, 산업문명은 불과 2초 전에 등장한다. 지구 전체 생명체 총량의 0.01퍼센트에 불과한 인류가 지구 생명체와 지구를 완전히 지배하고 야생 포유류의 83퍼센트와 해양 포유류의 80퍼센트, 식물의 50퍼센트와 삼림의 50퍼센트를 멸종시켰고 인류 자체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다. 산업문명은 생산 비용에 포함되지 않는 환경에 미친 부수적 피해는 원칙적으로 무시된다. 인류는 산업 문명 전체에 대해 적절한 전 지구적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환경과 새롭게 관계를 맺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듯 근본적인 깨어남 없이는 전염병은 언제든지 또다시 되풀이될 수밖에 없고 기후위기에 대한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한다면 문명의 종말은 물론이고 지구 역사상 6번째의 대멸종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유일한 해결책은 모든 종교와 영적 전통이 강조하는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상대를 대접하라’는 황금률로 돌아가 거기에 맞춰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공자도 평생 인간이 실천할 만한 것으로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상대에게 베풀지 말라는 이 황금률을 꼽았다. 

첫째. 황금률은 상호연결과 연민의 원리이며 모든 종교적 윤리적 영적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다. 연민을 품고 있으면 상대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애쓰게 된다. ‘당신 먼저’ 즉 세상의 중심에서 자신을 끌어내리고 거기에 상대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모든 상대의 신성을 존중하게 되고 예외 없이 상대를 절대적 정의로움과 공정함과 존중감을 갖고 대하게 된다. 

우리는 이 황금률을 경제에 적용함으로써 현재의 단기 경제학을 장기 경제학으로 바꿀 수 있다. 단기 경제학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빨리 많은 돈을 벌겠다는 이기심과 탐심의 경제학이며 막대한 외부비용을 발생시키고 그 부담을 미래로 떠넘긴다. 반면 장기 경제학은 ‘우리가 다른 세대에게서 바라는 만큼 미래 세대에게 베풀자’라는 대대손손 황금률을 적용한다. 또한 정치에 적용함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정치적 차이에서 비롯되는 갈등들을 창조적으로 끌어안아 민주주의의 기반인 시민공동체를 해체하지 않고 새로운 형성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다양성과 서로의 차이를 수용하는 이 마음습관이야말로 민주주의 성취의 핵심이자 공공선인 것이다.

둘째. 황금률은 모든 것을 도구로 간주하는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 중심이 살아 숨쉬는 ‘나와 너’의 공동체로 열어 간다. 예컨대 교회의 성사는 성체성사로 집약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성체성사는 가톨릭 신앙생활의 토대이자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생명의 빵을 먹음으로써 그 빵을 주신 분과 하나되고 빵 조각을 나눠 먹는 뭇 존재들과도 한몸이 된다. 황금률은 생명의 빵을 우리의 삶과 연결하며 하느님과의 일치는 물론, 이웃과 하나 되는 사랑 나눔의 실천이다. 섭생은 나 아닌 것이 나와 하나를 이루고 커다란 전체 즉 우주적 공동체에 대한 깨달음이 일어나는 과정이자 치유와 영적 변화, 용서와 초월적 사랑을 포괄하는 은유다. 

황금률은 공생 공존하는 모든 생명 공동체의 상호연결과 연민의 원리에 관한 분명한 가르침이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폭력에 떤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사랑한다. 다른 존재 안에서 자신을 볼 수 있다면 결코 누구도 함부로 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지사지의 공감 능력이야말로 뭇 생명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원수조차도 사랑하는 깊은 차원에까지 우리를 안내한다. 생명을 빼앗는 문제에 관한 한 우리가 아무리 겸허한 마음을 가져도 지나치지 않다.

식재료로 쓰이는 동물의 고통, 그 고기를 먹고 그들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인간들의 고통, 그 동물들을 먹이는 곡물이라면 충분히 배부를 수 있는 굶주린 사람들의 고통, 생태계와 다른 피조물, 그리고 다음 세대에 무의식적으로 가해지는 고통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고통의 상호연관성은 사랑, 보살핌, 자각과는 반대이며 이는 전적으로 우리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이미지 제공 = 한국채식문화원)

셋째. 동물을 무자비하게 죽여 식용으로 먹는 관행은 우리 문화의 최대의 그림자다. 무한한 사랑과 축복이어야 할 식사가 죽음과 폭력, 고통과 죄의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제의가 되었다. 이 그림자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오늘날 인류가 처한 전쟁 기아 질병확산 아동학대 소비지상주의 기업착취 소외 생태계파괴 대멸종 등등 온갖 문화적 곤경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동물성 음식을 온전한 정신으로 바라본다면 필연적으로 고통 잔인함 착취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깊이 바라보길 거부한다. 인류의 가장 기초적인 활동이자 주요한 의식인 식사에 대한 이 회피와 부정의 관습은 삶의 공적 사적 영역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으로 인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회피와 부정의 문화가 현대 인류의 깊은 분열증과 그림자가 되어 투사를 통해 또 다른 수많은 상처와 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다. 즉 식사에 담겨 있는 억압과 배제의 체계적 관습은 모든 생명체의 상호의존성을 적극적으로 무시하고 본연의 지성과 연민을 차단해 버린다. 관계를 찾아내는 능력이자 고통을 덜어 주려는 열망이 억제됨으로써 기아, 생태계와 공동체 파괴, 전쟁 그리고 미래 세대에 끼치는 고통에 무감각해질 뿐 아니라 그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능력도 없어진다.

하느님은 선 자체이고 선 그 자체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선하게 만드셨다. 선함은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니다. 우리의 선함은 이미 우리가 받은 선물과 사랑이며 우리가 인정하고 감사할 대상이다. 이 사실은 황금률의 실천이 어렵고 성인들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의미한다. 누구나 본래의 선함을 재발견하고 그에 맞게 행동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즉 선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사랑의 본성으로 되돌아가 본래 갖고 있는 선함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물론 예전의 습관과 결별하고 올바른 선택을 내리는 습관이 깊게 뿌리내리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걸리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쉬우면서 중대한 황금률의 실천은 일상의 밥상에서부터 비롯된다. 본래의 사랑과 연민을 억압하는 모든 관행에서 해방되는 ‘깨어 있음’이다. 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의 통제 범위 안에 있고 우리의 본성과 문화, 지구 전체의 정치 경제 생태계 질서와 연관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를 묻기 위해서 가장 개인적인 문제 즉 우리가 무엇을 먹는가에서 시작할 수 있다. 

오늘날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보여 주며 상황은 매우 긴급하다. 아무리 먹기 위해 기르는 가축들이라고 해도 지금처럼 심하고 무자비하게 조직적으로 수정되고 길러지는 과정에서 대량의 학대가 자행된 적은 역사상 없었으며, 대량 사육으로 인한 지구상의 자원 소모 및 환경오염이 이처럼 막대한 적도 없고 기후변화와 만성질병 및 인수공통 전염병 창궐의 주범으로 지목받기 때문이다. 

즉 개인이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 하는 겉보기로는 사소한 문제는 이미 지속가능성 논의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이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밥상에서부터의 생명존중, 지구생태계 보호, 윤리적 소비 등으로 표현된 사랑과 연민은 더 큰 사랑과 연민을 끌어오며 황금률의 실천 또한 더욱 탄력을 받는다. 상호연결의 감수성도 커지고 세상을 보는 눈 또한 나날이 새로워진다. 유유상종이랄까. 뿌린 대로 거두는 이치다.

성 프란치스코는 들에 나가면 풀 한 포기와 대화를 하고, 벌레 들새들과 대화를 하고 그 만나는 자리마다 하느님이 계심을 알았고 하늘 나라가 무엇인지를 직감하였다 한다. 궁극적으로 황금률의 대상은 인간과 뭇 생명에서 나아가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사실 이 대상의 확대는 동시에 한 존재의 생명 그 자체의 신비에 대한 깊어지는 이해와 통찰의 과정이자 반영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간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아들로 오신 분이 아니라 우주 일체를 자신의 몸으로 섬기시고자 오신 분이고 모든 존재는 그 안에 바로 그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황금률은 비단 종교와 영적 전통뿐 아니라 자연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전통문화와 신화 속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심지어 그 대상이 동식물까지 자연스레 확대됨을 알 수 있다. 옛사람들은 콩을 심을 때 세 알을 심곤 했다. 하늘의 새와 땅의 벌레가 각각 한 알, 사람이 한 알을 먹도록 배려한 것이다. 알에서 벌레들이 나오는 시기나 혹은 그외 미미한 벌레들 즉 개미나 지렁이들이 짚신에 밟혀 죽지 않을까 해서 엉성하게 만든 오합혜나 늦가을 감 수확 시 다 따지 않고 까치와 새들이 먹을 수 있도록 남겨 두는 까치밥 등도 그중 하나다. (제공 = 한국채식문화원)

고용석
비건채식운동가. 1994년, 환경·시민·종교단체가 총망라된 국내 최초의 국제 채식 심포지엄 ‘채식이 지구를 살립니다’와 미래진단 세미나 '퓨쳐비젼'을 비롯하여 세계를 연결하는 지구온난화 글로벌 컨퍼런스 등 수십 차례의 창의적이고 선구적인 프로그램들을 기획해 왔다. 세계 NGO대회와 유엔 사막화와 생물다양성, 기후변화 관련 활동에도 참여하며 방한 종교및 환경지도자의 통역일과 각종 주요신문의 컬럼리스트와 자유기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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