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5월 10일(부활 제5주일) 사도 6,1-7; 1베드 2,4-9; 요한 14,1-12

사랑은 매우 고약하다. 너무도 분명한데 어떤 정의도 내릴 수 없다. 실제인데 잡히지도 설명되지도 않는다. 언어로 표현하려 들지만 표현하는 순간 달아나 버린다. 그래서 사랑은 채울 수 없는 고백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사랑의 이름으로 자신을 내어 주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럴수록 관계는 점점 더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어떤 이는 자신의 사랑이 정상에 바위를 올려놓는 시지푸스의 시도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것은 중력 같은 것이어서 ‘너를 위한 것’이라 떠메는 순간, 자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만다. 왜 그럴까? 그건 사람이 본시 나빠서가 아니다. 중력은 전체 사회가 만드는 힘의 총체다. 어떤 특정 대상을 사랑(욕망)하도록, 그것과 사랑에 빠지도록 잘 짜여진, 그러나 보이지 않게 잘 감추어진 체계다. 정확히는 내가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것을 욕망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타락한 에너지라 부르고, 요한사가는 이를 ‘어둠, 죽음, 눈먼 자, 불신, 질투’ 같은 것으로 표현했다. 사람은 보통 이 모순적 반작용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서 무한반복의 회로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제자들의 인식도 회로에 갇혀 있긴 마찬가지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그 길을 알려 달라’는 토마스와 아버지를 보게 해 달라는 필립보의 질문이 항시 잔존해 왔다. 여느 땐 이들이 한배를 탄 공동체인지조차 의심스럽다. 예수와 함께 걸어오면서도 그것이 걸어야 할 ”길이고 진리며 생명”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제자들이 예수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도 뵌 것이다.”(요한 14,6-9) 실제로 예수는 복음서 곳곳에서 ‘아둔한’ 제자들로 인해 거듭 탄식해야 했다. 우리가 보기에도 그들은 한참이나 어리석어 보인다. 이들은 대체 예수에게서 무엇을 보고 듣고 기대했다는 말인가? 과거 그들의 우를 읽고 판단하는 우리도 그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유는 예수의 언어가 도달하기 힘든 신적인 언어라서가 아니다. 우린 그의 언어를 알고 싶지 않다. 그의 언어를 알아간다는 것은 나의 익숙한 사고와 행동 패턴에서 빠져나와 다른 길을 가도록 요청받는 일이다. 아무도 두려움과 고통을 짊어질 무모한 일에 자신을 내던질 만큼 어리석지 않다. 그래서 계속 반복적으로 중심을 비켜나는 질문만 하는 것이다.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누구인지 모른다며 딴청을 부리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사용되는 ‘사랑하다’는 동사는 ‘알다(깨닫다)’의 인식과 함께 빛, 진리, 믿음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예수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제자들조차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으라”(11)고 간곡히, 간절한 어조로 당부한다. 이 말은 마치 최후에 도달한 유언처럼 읽힌다. 결국 자신의 행위와 사랑을 입증할 방법이 없을 때, 그 사랑을 지탱하고 유지시킬 마지막 보루는 믿음인 것이다. 믿음은 명확하지 않다고 의심하는 자에게, 여전히 시야가 가려서 어둠인 자에게 ‘빛’으로 작용한다. 믿음은 사랑의 모든 결함과 모순을 유보한 채 보이지 않는 길을 나서도록 만든다. 앞으로 계속 전진하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예수는 이 믿음을 또다시 생명으로, 빛으로, 부활로 명명해 나갈 것이다. 명명해 나가면서 어둠과 절망, 파괴와 같은 죽음의 자기장을 벗어나게 할 것이다. 부활 이후 예수가 보낸 만인에 대한 메시지는 자기 회로에 갇힌 세계를 중력으로부터 끌어올리고 밀어내서 다시 세우게 하는 힘에 관한 메시지다. 믿음은 이 역할의 원천적 동력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존재하다(exist)“는 언어는 이런 중력이나 관성을 단순비교만으로도 알게 하는 강점이 있다. 이 단어는 본래 비존재 상태의 ‘있다(sistere)’에서 ‘빠져나오다’의 접두사(ex)가 결합해 만들어진 복합어다. 정체된 내부에서 벗어나는 자, 세계와 연결해 나가는 자, 종교적 언어로는 나를 신(너)에게 내어 주는 자다. 예수는 이를 자신에서 빠져나와 ‘아버지 안으로’, 아버지는 아들 안으로, 다시 우리들 안으로 들어오는 행위로 발전시킨다.(11) 이들 존재의 최종적 근거는 예수가 하는 행동(미션)에서 드러날 것이다. 그의 사명이 이들 존재를 알려주는 유일한 방식인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행위는 예수가 이루고자 했던 세계를 이어받는 것, 그 세계를 지속해서 확산시켜 나가는 데 있다. 그 외에 다른 방도는 없다. 사랑은, 곧 구원은 자기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힘에 맞서 ‘너’를 살리기 위해 밀어내는 모든 시도, 건너감으로 점철되는 무수한 과정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를 현대의 언어로 재해석했다. 그가 발표한 '복음의 기쁨'은 발표 당시 정체된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유례없는 문헌으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막상 문헌이 예리한 칼로 교회의 심장을 겨누자 열풍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사그라들었다. 문헌 49항을 보면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짐작케 한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가 되라,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힌 교회’는 속히 빠져나와 사람들의 곁으로 가라, ‘거짓 안도감을 주는 조직들 안에, 가혹한 심판관으로 만드는 규칙들 안에, 그리고 우리를 안심시키는 습관들 안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라’, 부디 ‘문밖에서 굶주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로 가라.’” 

이렇게 “복음의 기쁨”은 교회를, 아니, 정확히는 힘을 행사하는 지도부의 체계를 당혹스럽게 한다. 만일 조항대로 살자면 현재의 교회는 가히 혁명적 수준으로 뒤집혀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말은 바로 하자. 우리가 예수를, 그의 길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