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제가 있는 곳은 6월까지 이동 제한령이 한 번 더 연장된 덕에 지난 3월 초부터 석 달째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글자로 쓰고 보니 그동안 많은 날짜가 지나갔음이 새삼 느껴져 가슴이 답답합니다. 매일 같은 사람과 공간, 산책하러 나가서 만나는 풍경조차 늘 반복되니 가끔은 멍해질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피정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세요. 수도자는 기도해야지!! 아니면 좋은 책이 얼마나 많아? 책을 좀 읽던가. 아니 이런 시기에 내면을 잘 갈고 닦으면 좋은 수도자가....” 

신부님께서 진심으로 오랜 시간 말씀해주신 해결법은 영 맘에 들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왠지 더 답답해질 것 같습니다.

무엇을 하면 나 자신을 다독이고 우울해지지 않게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정말 한 번도 안 해 본 것을 해보자!’라는 뜬금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심사숙고하여 고른 제빵 영상을 여러 번 반복하여 시청하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영상만 보았을 뿐이었는데, 마치 이미 직접 만든 느낌이 들어서 약간 질리고, 좀 귀찮아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 새 시큰둥해진 저를 다독여 부엌에 내려가 한가득 벌려 놓고 빵 만들기를 시작했습니다. 의기양양 오븐 앞에서 기다리던 저는 상상과는 좀 다른 결과물을 보고 약간 당황했습니다.

‘분명 조리법도 제빵 과정도 5번이나 본 영상 그대로인데 이게 무슨 일이지? 분명 어젯밤 내 머릿속에서는 완벽했는데.... 빵은 그냥 사 먹는 것이지. 전문가분들이 왜 계시겠어. 다시 안 만들 거야.’

온갖 생각을 하고 있던 제게 한 수녀님께서 슬쩍 다가와 한 말씀 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이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너를 칭찬해주고. 거기에 멈추지 않고 결정한 것을 실행에 옮긴 너를 또 칭찬해주고. 거기서 얻은 긍정적인 에너지로 다음번에는 이번과 좀 다르게 해보면 되지. 설마 이제 다시는 빵을 안 만들겠다. 뭐 이렇게 끝나는 건 아니지?”

ⓒAna Morales rscj

‘찬미받으소서’가 반포된 지 벌써 5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한 주, Laudato Si Week('찬미받으소서' 주간)이라 하여 많은 분이 기도와 성찰을 하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칼럼과 기사, 영상 등을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 나아가야 하는 방향 등이 제시되고, 특별히 지금 전 세계가 처해 있는 이 어려움 안에서 우리는 더 깊은 반성과 행동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찬미받으소서’를 읽고 당시 지구의 심각성에 관해 함께 나누고, 이제는 정말 뭔가 행동해야 할 때라고 느낀 지가 벌써 5년 전이라니요. 그 후로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인터넷이라는 대단한 기술 덕에 우리는 예전에 비해 엄청난 속도와 양의 정보를 많은 사람과 나누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정보 수용에 그치기만 하지는 않는지요? 

마치 제가 제빵 영상을 5번이나 본 후, 제빵 장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막상 진짜 빵을 만들기가 좀 귀찮아졌던 것처럼 말입니다.

5년이 흐른 후의 저 자신을 성찰해보니, 저는 많은 글과 세미나 등을 통한 좋은 내용의 과도한 입력을 통해 마치 저는 그 내용대로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으며 지내온 것 같습니다. 종종 일어나는 환경 문제를 보며 입으로만 다른 사람들의 무지함과 잘못을 탓하면서 말이지요.

입력만 있고 그에 상응하는 출력은 없으니 머리만 점점 커져 뒤뚱거리며 걷는 꼴입니다. 어쩌다 작은 것 하나 실천하더라도, ‘내가 이렇게 하면 뭐해 안 하는 사람이 더 많은데. 이게 문제야 정말!’ 하며 비난만 퍼붓다가 금세 손을 놔버리고 말았던 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방식, 서로를 대하는 방식 그리고 창조주를 대하는 방식에는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는 온전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자연을 막 대하면서 어찌 인간을 존중하며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주변 형제에게는 관심도 없으면서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만 잘 되면 괜찮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제는 방대한 정보들에 압도되어 마치 내가 다하고 있다고 믿는 뇌에 속지 말고, 작은 것이라도 조금씩 해봅시다. 물론 실천할 것은 적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까요.

제가 소속되어 있는 성심수녀회에서는 희망의 장인(匠人, Artisa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이 세상 안에서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부르시는지, 무엇을 하라고 부르시는지 그 음성을 식별하면서 나온 단어입니다.

저도 아직 완전한 방향을 잡지 못해 조금 부끄럽지만,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우리의 축복받고 부서진 이 세상에서 희망의 장인(匠人, Artisan)으로 살아가기”에 동참하시겠습니까?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야고 2,14)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야고 2,17-18)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까? (야고 2,20)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야고 2,24)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야고 2,26)

 

이지현

성심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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