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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의 근원과 영적 그림자

기사승인 2020.06.15  15: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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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고 - 고용석]

유명한 다큐멘터리 ‘어리석은 자들의 세기’는 2055년 급격히 진행된 기후변화가 지구를 초토화시킨 뒤 과거 북극이 있던 자리에 세운 인간의 모든 업적이 보존된 글로벌 아카이브에서 오늘의 자료 화면을 보며 묻는다. “우리는 어째서 아직 기회가 남아 있을 때 기후변화를 막지 않았던 것일까?” 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기후변화를 걱정하면서도 석유를 펑펑 쓰거나 마을에 풍력발전기 설치를 반대하는 사람들, 미국식 삶의 방식은 낭비라고 말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아프리카인 등등 여러 삶의 양상들을 보여 준다. 영화는 그 답이 인류가 어리석거나 자기 파괴적인 것과는 별 관계가 없고 모든 것이 문화와 관련 있다고 말한다. 인류는 문화시스템에 배태되어 있고 문화에 의해 형성되고 제약을 받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삶의 현실 문화 안에서만 행동한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대부분은 문화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전쟁을 일으켜 서로를 죽이고, 소수가 엄청난 부와 권력을 행사하여 절대다수의 다른 사람들의 굶주림과 고통을 방관하며,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자연을 훼손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을까? 어째서 우리는 소비를 행복의 척도로 여기고 전 세계가 선진국의 과시적 소비행태를 모방하며 무한 성장에 목매달고 생태계 파괴의 외부비용 따위는 무시하게 된 걸까? 그렇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근심·걱정·불안이 끊이지 않고 끝없이 성공과 권력과 명성을 좇으면서도 만족감과 성취감 대신 불만을 느낀다. 상대와의 공통점보다 차이점에 민감하며 심지어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곤 한다. 끊임없는 전쟁과 사회적 불평등, 생태계의 교란을 야기하는 사회체제에서 평화와 정의로운 사회, 조화로운 생태계를 가져올 수 있는 사회체제로 전환한다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문화의 근원까지 거슬러가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문화 속에서 태어나 문화 속에서 성장한다. 또한 문화는 우리 안에 존재한다. 델포이 신탁의 경구 "너 자신을 알라"처럼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문화를 알아야 하고 문화를 알면 자신을 알 수 있다. 문화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보는 것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야기는 우리 삶을 어린 시절부터 관통하여 흘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명체들, 나아가 만물을 바라보는 색안경이 된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인 것이 소위 문화다.

모든 문화는 밑바탕에 문화를 전제하는 정신이 깔려 있다. 인류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음식을 통해 한 사회의 규범 가치 정신이 세대와 세대로 전달된다고 한다. 음식은 친밀함의 은유이고 경제의 토대이자 영적 변화와 통합, 내면 문화의 상징이다. 또한 대지의 신비와 인간 그리고 자연 관계를 반영하고 연결한다. 먹는다는 것은 가장 정교한 사회의식일 뿐 아니라 우리는 먹는 것을 통해 근원적이고 무의식적 차원에서 문화적 가치와 패러다임에 참가한다. 한마디로 음식을 돌아보는 것은 자신과 문화의 심장부를 들여다보는 모험이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음식은 장막 속에 가려져 있으며 무엇을 먹는가에 대해 알려고 드는 것은 일종의 금기다. 음식은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부모나 가족 문화에 의해 강요되며 ‘주어진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식사를 통해 음식을 둘러싼 복잡계 패턴에 항시 노출되어 있다. 그 패턴에 가담하면서 문화의 보이지 않는 전제들과 가치를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길들어진다. 예컨대 고기에 대한 열망은 선택이 아니라 당연시되고 있는 사회적 규범, 질서(order)에 따른 결과다. 마치 매트릭스처럼 문화의 프로그램에 세뇌되어 스스로 선택했다고 착각한다고 할까. 그렇기에 문화적 제약에서 벗어나 질서가 의미하는 공적 담론에 의문을 갖고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현대문화의 근원은 만 년 전에 일어난 혁명에서 태동했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산업혁명이나 과학혁명과는 달리 이 혁명은 무려 2000-3000년에 걸쳐 인류 역사에 지속하며 인간의 사고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느리고 강력한 혁명이었다. 1만 년 전에 문명의 발생지인 현재의 이라크 지역에서 인류는 최초로 양을 가축화하기 시작했고 염소, 소, 말 등이 차례로 가축화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신성하고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 왔던 생명체는 오랜 기간을 통해 사물-그것으로 축소되고 상품화되기 시작한다. 특히 암컷은 많은 젖과 번식에 관련되다 보니 가장 먼저 축소되고 다른 가축들도 그 뒤를 따른다. 야생동물조차 신비의 존재에서 가축을 노리는 유해동물로 축소된다. 가축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고 인간도 덩달아 축소된다. 암컷과 새끼가 먼저 축소되듯 특히 여성과 아동이 빠르게 축소된다.

5000년 전 가장 오래된 모든 역사적 기록물에는 공통으로 억압적 가부장제와 사유재산, 그리고 부와 자본으로 대표되는 지배계급이 등장한다. 자본이란 단어는 소와 양의 머리를 뜻하는 라틴어 ‘카파타’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인류사회에 두 가지 제도가 잇달아 발생하는데 하나는 전쟁이다.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전쟁을 가리키는 ‘가비아’는 ‘더 많은 소를 가리키는 욕망’을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노예화다. 전쟁에 승리한 자는 상대편의 가축을 소유하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다. 이렇듯 가축화가 가져온 축소와 환원주의 혁명은 전 세계로 퍼져 현재 인류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은 지배적 위계구조로 오늘날까지 확장되고 진행 중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패러디하여 공장식 축산의 실상을 폭로한 프리레인지 스튜디오의 대표적 사회적 마케팅 캠페인인 애니메이션 '미트릭스'(Meatrix)는 2003년 5만 달러로 제작하여 4000만 명 이상이 이 메시지를 접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존재는 폭력에 떤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사랑한다. 다른 존재 안에서 자신을 본다면 어떻게 누군가를 해칠 수 있겠는가.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사육되고 도축되는 가축을 인류가 소비하고 처분하는 방식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다. 그 고통과 처참함은 역사상 일어난 모든 전쟁이 만들어낸 비극을 다 합한 것보다도 크며, 이 시대에 우리에게 던져진 가장 시급한 윤리적 문제 가운데 하나다. 또한 인간 질병의 75퍼센트 이상도 동물이나 동물성 식품에서 유래된 병원체가 원인이다. 특히 공장식 축산은 마치 수백억 가축들을 시험관 삼아 바이러스를 배양하고 변형시키면서 전염병이란 룰렛에 넣고 탄창을 돌리고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의 죄악과 함께! (이미지 제공 = 한국채식문화원)

근대 자본주의와 현대 사회의 토대와 심리적 기틀도 이 목축문화에 있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특히 오늘날 목축문화는 제도와 기술의 허울 속 깊은 곳에 모습을 숨기며 기업, 언론매체, 정부, 교육, 식품업체, 의료, 제약, 영양학계 등등이 총망라되어 광범위한 파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게다가 비가시적이고 현대 사회의 상징인 효율성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제도적으로 자행되므로 그 폭력성을 알아차리기가 더욱 힘들다.

첫째, 동물을 식용으로 삼아 학대 살해하는 행위는 단연코 우리 문화 최대의 그림자다. 식사마다 살아 있는 생명체와 그 고통을 회피 부정함은 인간 본연의 연민과 자각을 축소 마비시킨다. 이러한 회피와 부정의 문화가 우리의 사적 공적 영역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 집단적 죄의식을 형성한다. 이 죄의식이 우리가 먹는 폭력을 감추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그림자의 투사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소비지상주의, 만성적 전쟁, 집단학살, 기아, 질병확산, 환경파괴, 생물종 멸종, 동물학대, 약물 중독, 소외, 스트레스, 인종 차별, 여성 억압, 아동 학대, 기업의 착취, 물질주의, 빈곤, 불의, 사회 침체 등의 총체적 문화적 곤경도 그 근원에 음식 선택의 연관성이 자리한다. 

이렇듯 음식과 음식을 선택하는 인식의 질은 개인과 문화 전반의 건강 지구 생태계 영성 인류의 태도와 신념 사회적 관계의 질 등에 막대한 영향 미침에도 동물을 식용으로 삼는 관행에 대한 집단적 무의식적 죄의식으로 인해 그 인과관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둘째, 우리가 한 조각의 핫도그나 햄버거 또는 치즈나 베이컨을 먹을 때 자신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를 직시하고 알아차리기를 회피한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일부러 스스로를 마비시키는 마음 자세는 내면의 연민으로부터 특정 존재를 배제하는 법을 학습한다. 즉 인간, 자연, 사회 등 모든 생명체 간의 유의미한 관계를 감지하는 우리의 능력에 심각하게 훼손한다. 이 세계는 오케스트라와 같다. 관계를 찾는 우리의 능력은 연주자 하나하나가 더 큰 전체로부터 피드백을 받으며 유의미한 연결 방식으로 전체를 섬겨 연주에 기여하도록 돕는다. 이는 상호의존성의 경험이야말로 삶의 의미와 행복의 주요 부분이다. 

전체를 섬기지 않거나 피드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세포는 자기본위적인 세포로 남아 결국 위험하고 해로운 암세포가 될 수밖에 없다. 동물의 식용화에 필요한 본연의 연민과 감수성에 대한 억압은 동물에게 행사하는 고통과 단절에 능숙해진 나머지 굶주린 사람들과 생태계, 피폐해진 공동체와 후손에 가하는 고통과도 노련하게 단절하게 된다. 지속가능성 위기와 문화적 곤경에 대한 온갖 논쟁에도 신기하게도 정작 그 중심에 있는 음식 선택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이유다.

셋째. 식재료로 쓰이는 동물의 고통, 그 고기를 먹고 그들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인간들의 고통, 그 동물들을 먹이는 곡물이라면 충분히 배부를 수 있는 굶주린 사람들의 고통, 생태계와 다른 피조물, 그리고 다음 세대에 무의식적으로 가해지는 고통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하느님의 선물이자 축복이어야 할 ‘일용할 양식’이 죽음과 고통의 악순환이 돼버린 것이다. 식사에 담긴 억압과 배제의 체계적 관습은 내면의 지혜와 자애롭고 축복받는 우주에의 소속감으로부터 우리를 단절할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상호의존성을 적극적으로 무시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지구와 우리 자신을 살해하고 본연의 지성과 연민마저 저버리게 된다. 동물을 단순히 상품과 음식으로 보는 문화를 유지하는 한 지속가능성이 어려운 이유다.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은 앞으로도 글로벌 경제와 인류의 삶을 위협할 상수로 존재할 것이다. 설사 백신이나 치료제가 개발되더라도 다른 형태의 전염병으로 다시 나타나고 그 주기도 점점 더 짧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2018년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IPCC)는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를 넘어서면 기후변화가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되어 인류가 노력해도 되돌릴 수 없음을 경고했다. 탄소예산을 검토하면 임계점까지 8-9년 남아 있는 셈이다.

일주일에 한 번만 햄버거를 줄이면 자가용으로 512킬로미터(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를 달렸을 때 배출되는 온실가스 양만큼을 줄일 수 있다.(미국환경단체 ‘EWG’) 인도에서 숲을 파괴하면서 햄버거 하나를 생산하는 비용은 보조금이 아닌 실질 생산비를 포함하면 무려 200달러에 달한다고 한다.(월드워치 1994년) 만약 3달러 햄버거 하나의 실제 가격이 200달러라면 197달러는 사회 전체에 세금의 형태로 전가된다. 현재 우리는 오염자의 외부비용을 사회 전체에 떠넘김으로써 그들에게 보조금을 주고 있는 셈이다. 이미 햄버거 3달러도 보조금에 의해 인위적으로 낮춰진 가격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유엔에 따르면 외부효과가 1위 2위인 축산업과 화력 발전이 동시에 가장 많은 보조금을 받고 있다고 한다. 만약 축산업에 대한 보조금을 친환경 소농을 장려하는 쪽으로, 화석연료의 보조금을 신재생에너지로 전환한다면 우리는 자연 인간 기후를 동시에 보호할 수 있다. (이미지 제공 = 한국채식문화원)

오늘날 직면한 환경문제와 온갖 문화적 곤경 및 우리 문화의 영적 그림자 등의 총체적 위기도 훌륭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종의 이야기의 과도기에 있으며 새로운 이야기를 못 배우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코로나19와 기후위기가 오히려 우리에게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재촉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도 배우는 것이 지정학이 아닌 생물권 정치다. 이들은 인간과 동물, 식물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리고 대기권까지 뻗어 있는 생물권 전체를 멸종위기에 놓인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고 인간이 하는 모든 활동이 모든 생명체와 생태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위기가 곧 기회다. 이제 우리는 문화 변혁의 한가운데 서 있다. 문화의 밑바탕에 깔린 억압과 배제, 경쟁과 분리라는 관념에 기초한 낡은 이야기를 협동과 자유, 평화와 생명을 긍정하는 새로운 이야기로 대체하는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의 탄생에 음식의 역할이 중요하다. 음식은 인류의 사고방식에 심오한 영향을 미치며 문화의 가치체계가 복제 재생산되는 근본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간단한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이다. 여기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우리가 깨어나면 문화도 깨어난다. 낡은 이야기에 기반한 모든 제도와 행위는 물론, 정체성까지 전적으로 문화에 의해 프로그램된 것으로 스스로가 자신의 힘으로 결정한 사항이 아니다. 모두가 이게 당연하다고 말하길래 단지 그 말에 따라 행하는 것일 뿐이다. 인류가 장막을 걷어 올려 식습관이 초래하는 고통을 직시할 때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무력한 존재의 현실과 접속할 때 얼음장 같은 무관심은 녹아내리고 따뜻한 연민이 솟아오르면서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을 위해 행동하게 된다.

영적 삶은 자비로운 삶이고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는 것이다. 자신의 일상과 선택이 다른 사람들과 동물들 그리고 다른 생명체에 미치는 연결 관계를 자각하는 삶이다. 이것이 모든 영적 전통의 위대한 가르침인 뭇 생명체들 간 상호의존성이다. 영적 건강과 사회와 조화로운 식생활로 기존문화에 내재한 폭력과 미망에서 깨어나야 지구 평화와 자유 및 지속가능성도 가능한 법이다.

윤리적 동기의 채식이나 비거니즘은 인간을 먹이사슬의 정점에 놓고 자연과 생명을 착취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인간중심의 세계관과 환원적 사고로부터의 전환 즉 문화적 전환이다. 차단해 온 내면의 본질적 연결성과 연민을 재발견함으로써, 대지와 인간, 동식물과의 관계를 새로이 한다. 기후변화와 전염병 창궐 및 만성질환 증가는 물론, 생물다양성과 식량 부족을 비롯한 대부분의 자원고갈과 환경파괴에도 결정적 계기가 된다.

깨어 있는 음식 선택과 그 선택하는 인식의 질은 우리 문화의 영적 그림자를 걷어내고 시민적 역량을 강화할 뿐 아니라 시민권의 공동체 범위를 주권 국가를 넘어 지구 생물권 너머까지 확대한다. 일상에 공공성을 담은 시민권 행사는 다른 커다란 이슈들에도 지렛대 역할을 하며 민주주의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이는 코로아19 이후 인류가 디자인할 새로운 경제나 글로벌 거버넌스(지구적 관리체제) 구축은 물론, 모든 인류 공동체 사이에 보편적 연대와 협력을 이뤄 내는 토대가 될 것이다.

고용석
비건채식운동가. 1994년, 환경·시민·종교단체가 총망라된 국내 최초의 국제 채식 심포지엄 ‘채식이 지구를 살립니다’와 미래진단 세미나 '퓨쳐비젼'을 비롯하여 세계를 연결하는 지구온난화 글로벌 컨퍼런스 등 수십 차례의 창의적이고 선구적인 프로그램들을 기획해 왔다. 세계 NGO대회와 유엔 사막화와 생물다양성, 기후변화 관련 활동에도 참여하며 방한 종교및 환경지도자의 통역일과 각종 주요신문의 컬럼리스트와 자유기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고용석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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