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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르 미싸빕

기사승인 2020.06.18  11: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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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숙 수녀] 6월 21일(연중 제12주일) 예레 20,10-13; 로마 5,12-15; 마태 10,26-33

예레미야가 하느님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았을 때는 요시아 왕이 한창 종교개혁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고질적인 부패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남유다 왕국은 급속히 몰락해 갔다. 당시는 유다를 둘러싼 주변 열강들, 앗시리아와 바빌론, 이집트의 각축전이 치열하던 때였다. 유다는 어떻게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 애썼으나 왕과 백성의 눈을 가리는 자들이 차고 넘쳤다. 가짜 사제들, 가짜 예언자들이 기승을 부렸다. 왕국은 고립되고 상황은 악화일로였으나 이들이 두는 훈수는 듣기 좋은 말 일색이었다: “주님께서 그러실 리 없다. 재앙이 우리에게 닥칠 리도 없고 우리가 칼이나 굶주림을 만날 리도 없다”(예레 5,12) 그러나 주님의 소리는 그와 정반대였다: “소름 끼치는 무서운 일이 이 땅에 일어나고 있지만, 예언자들은 거짓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사제들은 제멋대로 다스린다. 그런데도 내 백성은 그것을 좋아한다.”(5,30-31)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어떤 길이 구원의 길인지, 혼돈에 혼돈을 거듭하고 있을 때 예레미야가 등장했다. 예레미야는 앞으로 닥칠 유다의 불행을 가감 없이 전하며, '하느님이 우리를 버리실 리 없다'는 거짓 유혹과 선전에 맞섰다. 유다는 최대 강자로 부상한 바빌론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 터다.(20,4-6) 예레미야의 경고가 있고 난 뒤 유다가 발칵 뒤집혔다. 오늘 독서는 이때 예레미야에게 쏟아진 비난의 일부다: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10) 마고르 미싸빕은 히브리어로 ‘사면초가에 빠진 자’라는 뜻이다. 예레미야에게 닥친 곤경은 물리적인 것도, 그렇다고 일부 따돌림도 아니다. 그는 온 나라의 역적이 되었다. 사람들에게서 예레미야는 입만 열면 유다의 비참한 최후를 외쳐 대는 불길한 예언자였다.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살길’과 미래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는 온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는 자, 주님이 기거하는 성전과 왕과 사제와 백성에게 저주를 퍼붓는 자다. 이런 자는 죽어 마땅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고발하라고 외치지만 정작 예레미야를 편들고 나선 이는 하느님이었다: 

“예루살렘이야말로 벌을 받아야 할 도성이다. 그 안에 온통 억압이 자리 잡고 있다. 폭력과 억압이 그 안에서 들려오고, 질병과 상처가 언제나 내 앞에 보인다. 내가 너를 폐허로 만들어 인적 없는 땅이 되게 하리라.(6,7-8) 그러니 너희는 그들이 떠드는 '여기가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 너희는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짓된 말을 믿고 있다. 너희는 (....)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7,3-14) 

'예레미야', 미켈란젤로. (1511)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이렇듯 속은 자들은 ‘마고르 미싸빕’이 실상은 자신들의 처지가 되리라는 것을 까마득히 모른다. 군중은 무엇이 팩트인지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묻는 일도, 의심하는 일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들에게는 다수의 욕망이 진리다. 무리의 함성이 자신의 목소리다. 그들은 비겁하고 게으르며 무책임하다. 그들이 염려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안위뿐이다. 그러니 변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따위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여기는 주님의 성전’이다. 그러니 무엇을 더 의심하랴. 성전을 부정하는 자야말로 반역이 아닌가. 예레미야의 마고르 미싸빕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유다가 사지로 내몰린 것은 순전히 왕국의 부패 때문이었다. 신의 분노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는 무죄한 이들을 사지로 내몬 권력(과 체제)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들이 세운 바알은 지배자의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 고안된 가짜 신이다. 거짓으로 구축된 세계에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거짓이 진짜보다 더 진짜로 행세하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이 왜 배제되고 있는지, 왜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되고 있는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신이 그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살길을 제시하려 나선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시 살 수 있는 길은 처음 맺은 계약을 회복하는 것, 그뿐이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 길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6) 것, 그뿐이다.

예레미야의 '마고르 미싸빕'은 세대를 거쳐 예수에게로 이어졌다. 그가 내다본 메시아(예수)의 나라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될 테지만, 이 나라를 선포하고 증언할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처럼 '마고르 미싸빕'의 운명을 질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의 이런 심정이 절절이 녹아 있다. 복음 8개의 구절이 일제히 “두려워하지 마라”에 압축되어 있지 않은가: “너희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참새도, 머리카락 한 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6-31)

2020년 신앙인들이 처한 상황도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신이 어떤 신인지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 가끔은 가짜들의 세계가 너무 정교해서 이 세계를 부수는 일이 맞는 것인지 헷갈리고, 그래서 가짜 사제와 예언자들의 무리에 섞여 예를 다하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녕 두려운 것은 우리 가운데서 고통받는 수많은 마고르 미싸빕을 외면하거나 그들 고통에 동조하는 일이다. 그런 줄도 모르면서.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강신숙 editor@catholicnews.co.kr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기사는 영리 목적이 아니라면 누구나 출처를 밝히고 무료로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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