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정의 휘청휘청: 흔들리는 모두에게]

지난 6월 26일 충남도의회가 학생인권조례를 통과시키면서 경기, 서울, 전남, 광주에 이어 다섯 번째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 2010년 이후 10년만인데 네 번째 조례였던 광주 이후 7년 만의 일이다. 그 사이 제정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수차례 발의 혹은 제정의 문 앞에서 가로막혔다. 반대하는 이들과, 그들의 반대를 받아 안은 정치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자유가 있다. 당연히 어떤 정책에 찬반의견이 갈릴 수 있다. 그런데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반대의 논거는 왜 이런 인권조례들이 만들어져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줄 뿐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그리고 모두 존엄하다

차별금지사유는 법과 조례마다 조금씩 다르게 열거되어 있다. 가장 최근에 통과된 충남학생인권조례는 합리적인 이유 없이 ‘학년, 나이, 성별, 성별 정체성, 성적 지향, 종교,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학교, 출신국가, 출신민족, 언어, 장애, 용모 등 신체조건, 임신 또는 출산, 가족의 소득수준, 가족의 형태 또는 상황, 인종, 경제적 지위,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질병 이력, 실효된 징계, 교육과정 선호도 또는 학업성적’를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모두 다르다. 당장 위에 서술된 내용만 보더라도 이 모든 사유가 일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유들에서 어떤 사유들은 빼야 한다는 논쟁에 시달린다. 어떤 사유들은 차별의 근거여도 된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존엄이 성적 지향이 달라서 성별 정체성이 달라서, 종교가 달라서, 장애가 있어서, 학생이 임신을 했기 때문에 존중받지 않아도 될 리 없다.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모두가 동일하게 존엄하다.

학생인권조례를 반대하는 언어 : ‘내 아이의 미래를 망친다’

충남도의회에서 학생인권조례 통과가 임박했던 그때, 도의회 앞에 달려와 학생인권조례에 반대하는 이들의 논거는 이러하다. 노동인권을 배우라는 것은 내 아이를 노동자로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추측컨대 여기서 노동자란 소위 사무직을 제외한 직종의 노동자를 칭하는 듯하다) 성교육을 하면 내 아이가 문란해진다, 소지품 검사도 절대 못해서 애들이 학교에 술과 담배를 가져올 것이고 수업시간에 핸드폰을 만져대도 규제할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를 내용들이 ‘내 아이의 미래’에 해가 된다며 아이들을 위하여 어른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대한민국에서 일을 하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1200명이 넘었다. <경향신문> 1면이 퇴근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이름으로 빽빽이 채워졌다. 사회에 큰 충격을 준 n번방 사건과 ‘영유아, 아동 성착취물’로 41억을 번 손정우 사건만 보더라도 성범죄 가해자의 연령이 점차 낮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건 모두 가해자들의 연령대가 20대 초반이며 10대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어른이 된다. 어떤 해 1월 1일이 되는 순간 이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24세까지는 국회의원, 39세까지는 대통령이 될 수 없지만) 하고 그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청소년 때 노동의 권리를, 정말 필요한 성교육과 성평등 교육을 하지 못하게 가로막으면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알아야 할 이 내용들을 언제 가르치라는 것일까. 피켓을 든 그들이 그리는 ‘내 아이의 미래’란 무엇인지 묻고 싶다.

경기도는 2010년부터 학생인권조례를 시작했다. (이미지 출처 = 경기도교육청TV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공동체의 약속을 만들고 실천해 나가는 연습

수업 중 핸드폰 사용과 같은 문제는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다고 손을 놓아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현행과 같은 규칙이라 하더라도 학생들 스스로가 약속에 참여하는 것이다. 내가 함께 참여하여 핸드폰 사용시간을 규제하는 것과 일방적으로 금지되어 있기에 아침마다 핸드폰을 제출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이다. "유예된 존재들"(공현 지음, 교육공동체 벗)에 소개된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어느 학교의 사례로 이런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학교 건물 밖으로 나갈 때는 실내화를 신지 못하게 규제하다가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규제를 없앴다. 대신 실내외화를 혼용했을 때 위생의 문제 등을 몇 차례 교육하였다. 학생들은 실내화를 신고 건물 밖에 나가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할 때보다 실내외화를 혼용하는 비율이 줄었다. 그러한 규칙이 왜 필요한지 설명하고 공동체가 납득하자 통제와 금지 없이 약속의 이행률이 높아졌다.

전 세계 어린이의 베스트셀러인 "해리포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악당 볼드모트와 주인공 해리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죽는다. 작중 그 둘은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 해리의 선생님인 덤블도어는 이 운명을 해리가 받아들이고 당당히 맞서는가와 이 운명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길고 긴 토론을 한다. 작가는 이 대화에 한 챕터 전체를 할애한다. 우리 앞에 주어지는 일을 내가 선택하느냐, 혹은 끌려가느냐는 삶의 주체성을 배우는 데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청소년기부터, 우리 인생의 첫 사회생활인 학교에서부터 공동체의 약속을 만들어가는 법,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그 약속을 이행하는 것을 연습하고 배우고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우리 사회에 학생인권조례가 필요한 것이다.

오늘도 ‘한 사람도 두고 가지 않는 세상’을 위해 분투하는 많은 사람이 있기에 학생인권조례는 경기, 서울, 전남, 광주, 충남에 이어 다른 지역에서도 제정될 것이다. 길을 지나다 그러한 움직임을 마주한다면 조례 제정에 힘을 보태 주시기를 바란다.

장예정(소피아)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인권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말에는 본당에서 청소년들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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