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코로나19 이후의 뉴노멀을 맞아, 우리 정책은 비대면으로 뉴딜과 그린뉴딜을 추구해야 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지식인들이 그렇게 말하는데, 외래어인 ‘뉴딜’도 살갑지 않지만, ‘비대면’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평소 격 없는 이웃이나 허물없는 친구와 이야기 나눌 때 거의 사용하지 않는 지식인 투의 말은 대중을 외면한다. 대중과 소통할 생각이 없다. 비대면이다. 지식인은 어떤 이의 귀를 의식하는 걸까?

코로나19는 ‘3밀’, 다시 말해 밀접, 밀집, 밀폐를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 사이에서 멀리 떨어져야 감염을 피할 수 있다고 방역당국은 지적한다. 코로나19 이후에 새롭게 등장할 직업은 사람들이 공유하며 북적이던 공간을 피하면서 돈을 벌어들이는 일자리인가 보다. 그런데 정부가 제시하는 일자리는 디지털 분야로 시작한다. 상식이 없으니 감을 잡을 수 없는데, 텔레비전에 등장한 전문가는 정부가 제시한 일자리는 3밀과 거리가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는다. 하지만 단순한 작업의 반복이다. 일시적 푼돈 벌이야 가능하겠지만, 자신의 장래를 맡기고 투신할 젊은이가 있겠나?

코로나19는 오히려 사람 사이의 관계가 끊겨서 생긴 측면이 강하다. 내가 재배한 농산물을 이웃과 나누는 사회, 집을 짓고 옷을 만드는 이웃이 자신의 재주를 빌려주며 서로 돕는 공동체라면 코로나19가 지금처럼 급속히 퍼질 수 없었다. 병에 든 이웃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를 조심스레 살펴 몸과 마음을 보살피는 공동체 사회라면 비대면은 가당치 않다. 거리를 두어야 할 전염병이라도 마음은 더욱 가까워질 텐데, 누구 제안이 주효했는지, 정부의 이번 뉴딜에서 온기는 느낄 수 없었다. 실직한 상태에서 격리된 불특정 다수에게 푼돈 쥐어 주는 대신, 거액 벌어들이려는 대기업이나 권력기관을 위한 은밀하고 차가운 뉴딜이 아닐까?

이번에 정부가 제안한 뉴딜을 분석할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으니 일단 넘어가자. 그런 일자리 제안이 온다면 외면하리라. 한데, 정부가 디지털 뉴딜과 더불어 발표한 그린뉴딜에 그린이 있을까? 그린 다시 말해 환경은 다음세대의 생존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텐데, 정부 발표에서 일자리 창출에 대한 의지는 엿보이지만 그린에 대한 진정성은 느끼기 어려웠다. 환경단체는 “목표 없는 그린뉴딜로는 기후위기 대응할 수 없다”라며, 즉각 비판했다. 목표가 없다고? 그린뉴딜의 주인공으로 애써 부각하려는 현대차는 발끈할지 모른다. 전기차와 수소차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는데.

전기차 특화단지. (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TV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코로나19 창궐로 일자리가 위축되기는 했다. 실직자를 위한 일자리 창출이므로 당연히 뉴딜일까? 디지털 일자리는 기존의 안정된 일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고 전문가는 분석한다. 그렇다면 반갑지 않은데, 그린뉴딜은 어떨까? 그린뉴딜에 어울리려면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해야 옳다. 전기차와 수소차는 지속 가능한가? 전기와 수소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자동차는 도시의 대기를 다소 깨끗하게 할 뿐, 온실가스를 거의 줄이지 못한다. 전기와 수소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도시 밖의 온실가스와 환경오염 물질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누가 감히, 사용하는 연료로 자동차에 친환경 작위를 준다는 건가? 화력뿐 아니라 핵발전소로 구한 전기를 활용하거나 천연가스로 수소를 분리한다면? 눈속임이다. 고속도로와 자동차를 없애며 창출하는 지속 가능한 일자리라면 그린뉴딜에 가까울지 모르지만.

다국적을 넘어 초국적인 기업의 화려한 광고와 세련된 디자인, 그리고 그들이 만든 삶의 방식에 마음이 끌려 세계인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현실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대화와 타협은 세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표준을 정한 거대 자본과 권력은 개성과 다양성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난 돌에 정을 대려는 기득권의 눈치를 보며 우왕좌왕하는 상황에 개인과 지역의 소박한 주장은 쉽게 무시된다. 개개인의 개성과 지역에서 자급하려는 의지는 조롱 대상이다.

유권자? 소비자? 그들은 길들어졌다. 길들어진 자들과 사전에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기득권은 없다. 철저히 비대면이다.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정책 결정에 주도권을 가진 자가 바뀌지 않는 우리 정부도 기득권이고, 기득권을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코로나19가 약진할 절호의 환경이다. 곡물과 축산물만이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그렇다. 교육, 종교, 의료, 돌봄 분야가 그렇다. 획일적이다. 우열을 사전에 정해 놓았다. 따르지 않는 자, 정 맞는데, 코로나19가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19의 경고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

우리와 우리 이상 돈이 많은 국가는 고유한 문화와 역사에 어울리는 정책, 전통으로 이어져 온 삶의 방식을 거의 잊었다. 기득권이 만든 표준에 길든 상황에서 잊은 삶의 방식을 되살리기 무척 어렵다. 보이지 않는 어떤 우두머리, 흔히 ‘빅브라더’라고 말하는 절대권력이 만든 제도에 순응한 개인과 지역은 소외되지 않으려 발버둥댄다. 1932년 소설 "멋진 신세계"가 드디어 실현되는 순간인데, 코로나19가 죽비를 들었다. 한데, 권력자가 제시하는 뉴노멀, 뉴딜, 그린뉴딜은 우리를 어디로 몰아가려고 하는 걸까? 백신? 치료제? 곧 출시될 거라고? 코로나19로 그치지 않을 텐데.

지구온난화는 점점 심각해진다. 기상이변을 맞는 생태계는 여기저기에서 스러져간다. 코로나19와 이어질 바이러스 창궐은 지구온난화 원인과 무관하지 않은데, 디지털 뉴딜, 그린뉴딜 운운하는 우리는 시방 한가하다. 기후변화는 한가롭게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더욱 근본적인 자세로 본질에서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무엇일까? 한두 가지만 살펴보자.

기존 사회 질서를 공고히 하는 대학을 그대로 두고 그린뉴딜이 가능할까? 지구온난화는 진정될까? 입학점수가 높은 대학일수록 자급하려는 농민과 농촌, 그리고 지역의 농업을 대체로 무시한다. 농토가 부족해도 위기의식이 없다. 이자 요구하는 은행을 유지하면서 그린뉴딜이 가능할까? 이자는 경제성장을 요구한다. 고갈을 앞둔 석유, 온실가스를 내뿜는 화석연료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경제성장은 불가능한데, 정부의 그린뉴딜에 탈성장이나 탈석유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경제학자 케네스 볼딩은 “경제성장이 계속될 거라 믿는 자는 미치광이거나 경제학자”라 냉소했다. 코로나19가 증명하듯, 기업이든 개인이든 경제성장 추구는 다음 세대 생에 치명적이다. 돈이 많아야 행복한 건 아니다. 지속 가능한 행복은 경제성장이 아니다. 선조가 누렸던 어제의 삶에서 내일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 바로 대면사회다. 얼굴을 마주하며 따뜻한 마음 나누는 이웃이 행복한 공동체다. 그린뉴딜이 반드시 향해야 할 방향이 그렇다.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 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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