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올해는 2020년이다. 이미 21세기가 시작된 지 두 번의 10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더군다나 올해 초부터 코로나 팬데믹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줄 누가 알았을까? 21세기의 첫 번째 10년 특히 그 초반은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전성기였다. 차베스가 그 상징이다. 베네수엘라 외에 볼리비아, 에콰도르, 니카라과, 브라질, 쿠바, 엘살바도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온두라스, 파라과이까지 그 리스트를 보면 대단했다. 물론 그 안의 흐름은 나라마다 맥락과 정치 지형이 서로 달랐다.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와 좌파 정부들은 베네수엘라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퇴조했다. 예를 들어 몇몇 나라들은 쿠데타로 좌파를 축출했고 일부 나라들은 합법적 선거를 통해 물러났다. 대표적인 경우가 브라질이다.

이 같은 좌파 퇴조는 내부와 외부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외부의 경우로 중남미가 ‘미국의 뒷마당’이란 말을 내세울 수 있지만 2000년대 초반에 미국은 중동문제(예: 이라크 전쟁)에 개입하느라 상대적으로 중남미에 관심이 덜했다. 이 글에서는 라틴아메리카 좌파의 퇴조의 이유를 그 내부에서 찾아보려 한다.

첫 번째는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면서 동시에 체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선거에서 이겨 좌파가 집권을 해도 국가기구를 장악했다는 의미이지 체제 자체를 변혁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우선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라는 건 사유와 담론이라는 의미인데 대중에 대한 이런 담론 지형의 핵심에 미디어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미디어는 우파세력이 독점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에는 1990년대에 두드러진 사회 경제적 불평등의 엄청난 양극화로 인해 신자유주의의 거짓 약속에 배신감을 느낀 대중이 좌파 정부를 지지했지만 위기를 인식한 우파 세력이 미디어를 통해 반격하여 좌파는 담론 싸움에서 지고 있었다. 

여기에 브라질의 경우에서 보듯이 복음주의 교회 등이 이 싸움에 가세하여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고 있었다. 이처럼 라틴아메리카에는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신자유주의가 도입되었으므로 그 체제가 ‘사회’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것을 많은 좌파 정부는 간과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조의 심층적 변혁이 필요했다. 특히 빈곤과 극빈의 퇴치가 중요한데 이것이 현재의 라틴아메리카의 사회 경제의 구조에서는 결코 쉽지 않다. 물론 말로는 ‘패러다임 변화’ 또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대안적 모델의 추구’ 등을 제안할 수 있지만 이를 실천적으로 밀어붙인 좌파 정부는 차베스 정부 외에 거의 드물었다. 

예를 들어, 차베스는 ALBA(2004년 아메리카 민중을 위한 볼리바르 대안협정-- 베네수엘라가 석유 이익을 종잣돈으로  폴라니의 선물 주기 철학에 의한 좌파 라틴아메리카 통합운동), UNASUR(2008년 남미국가연합으로 인권, 이주 보건및 에너지 통합을 통한 지역안보 지향), CELAC(2011년 라틴아메리카 카리브 국가 공동체로  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한 라틴아메리카만의 EU와 같은 공동체 지향), PETROCARIBE(2005년 베네수엘라가 가난한 카리브 소국들에 석유를 싼 값에 공급하는 연대적 기구), MERCOSUR (1991년부터 시작된 브라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파라과이의 지역 공동시장인데 베네수엘라가 가입하면서 미국과의 교역보다 상대적으로 역내 교역을 중시하였음)등을 주도했다.

이 프로젝트들은 미국의 신자유주의 모델과 동떨어져 미국이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개입된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도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의 이익을 취하는 데 치중했지 대안모델의 제대로 된 변혁에는 실패했다. 베네수엘라는 여러 경제 정책의 혼선과 부정부패 등의 잘못도 있었지만 아래로부터의 소규모 대중 공동체운동(일명 ‘코무나스’ 운동)이 그런대로 정착했고 특히 가난한 아프리카계 여성들이 고등교육에서 배제되어 있었는데 이를 변혁한 것은 큰 성과였다. 이런 사회구조의 변혁들이 2019년부터 미국과 연계된 우파의 공격이 매우 치열했음에도 마두로 정부가 버틸 수 있는 디딤돌이 된 것인지 모른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1999-2013) (사진 출처 = ko.wikipedia.org)

두 번째는 ‘부패’다. 특히 좌파 정부들에게 치명상이 된 것이 바로 이 문제다. 대표적인 사례가 브라질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조국 사태’ 이후 현재의 여당과 정부가 많이 흔들리게 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너무 진부한 얘기지만 대중이 보기에 원래 우파는 자기 이익을 위해 ‘도둑질’을 하지만 좌파는 멋진 말로 많은 약속을 했음에도 부패하는 것은 ‘배신’이 되기 때문이다. 전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후자는 용서가 되지 않는다.

세 번째는 우파가 모든 수단을 써서 경제적 사보타지, 거리 시위, 사법부 조종, 가짜뉴스와 추잡한 미디어의 조작 등을 통해 좌파 정부를 공격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코로나 팬데믹은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코로나 이후’의 세계는 개인주의가 아닌 공동체주의가 그 기반이 되어야 함을 모든 사람이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낙관적 전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사람들이 코로나 사태에서 진정 깨닫고 있는 것은 자신의 생명의 소중함(?)일 것이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빈곤계급이 현재 처하고 있는 비공식 노동(?)(예: 길거리 행상 등)은 재택근무나 거리 두기와 상관없이 그 활동을 지속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대중은 권위주의적인 통치자에게 주권을 양도하는 것이 쉬워 보인다. 하지만 이런 국면에서 좌파 지도자들은 공공의 건강과 민주주의 그리고 개인의 자유의 확보는 함께 나아가야 함을 대중에게 설득해야 한다. 오히려 권위주의적 통치자는 모든 것을 망치기 쉽다. 그 사례를 우리는 브라질에서 찾을 수 있다.

결국 또 진부해 보이는 이야기지만 좌파는 거의 운명처럼 항상적 성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우리는 이 권위주의적 지도자를 물러나게 하고 싶은가? 그것으로 충분한가? 더 긴밀히 대중과 수평적인 수준에서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코로나 방역의 기준과 원칙과도 ‘다른’ 맥락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우파는 자신들도 대안이 없으면서도 조금의 좌파의 잘못도 아주 중요한 전략적 기반으로 삼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라틴아메리카만이 아니라 우리의 경우에도 중요한 얘기지만 좌파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코로나 이후’ 미래의 대비를 위해서 그렇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의 삶의 현실에는 과거 마르크스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사전적으로 이미 준비된 틀의 마르크스주의로 그 해석을 시도해서는 오류가 날 수밖에 없다. 물론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익숙하고 손쉬운 해석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 독립적이고 더 용감한 해석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의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기본적 전제들인 근대성의 철학적 인식론적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상해야 한다. 

하나의 대안적 오솔길은 바로 '영성적 힘'의 재인식 또는 '이성'과 '정동-집단적 감정'의 대화에 있을 것이다. 후자의 의미는 자본주의 이후의 거대한 변혁의 대안적 프로그램들이 엘리트의 설명이 아니라 대중의 ‘사랑’을 받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런 흐름을 체득하고 있는 지도자가 그립다.

 

안태환(토마스)
한국외대, 대학원 스페인어과 
스페인 국립마드리드대 사회학과, 콜롬비아 하베리아나대 중남미 문학박사 
부산외대 중남미지역원 HK교수, 성공회대학교 민주주의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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