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 김성환 신부]

이 글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실린 글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한참 제주해군기지 반대활동을 하던 시기에, 어떤 사람들은 반대 활동을 하던 사람들에게,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서 해군기지가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국가안보를 위해서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정말 제주해군기지가 국가안보를 위한 기지이었다면, 그 당시에 수많은 국내외의 사람들은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제주해군기지가 방어기지가 아니고, 미국에 의한 중국 침략의 전초기지가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주해군기지의 건설과정 자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 후에 정부는 국가안보라는 핑계로, 국책사업을 밀어붙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도 그러했다. 사람들은 국가안보라고 하면, 따질 필요 없이, “국가가 알아서 어련히 잘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국가가 하는 일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국가안보 우상숭배주의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국가안보를 이용해서 국책사업을 밀어붙이는 정부를 무조건 따르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국가안보를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국가안보 우상숭배주의자들의 생각 뒤편에는, 정당한 전쟁론이 자리 잡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톨릭교회의 암브로시오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거쳐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 때에 확립된 정당한 전쟁론은 종교개혁 장본인인 루터조차도 지지했던 전쟁이론이다. 1700년 동안 가톨릭교회에서 맹위를 떨쳐 온 정당한 전쟁론은 지금도 여전히 가톨릭교회의 교리서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가톨릭교회 교리서 2309항은 정당한 전쟁을 할 수 있는 여러 조건을 열거한다.

“1. 공격자가 국가나 국제 공동체에 가한 피해가 계속적이고 심각하며 확실해야 한다. 2. 이를 제지할 다른 모든 방법이 실행 불가능하거나 효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3. 성공의 조건들이 수립되어야 한다. 4. 제거되어야 할 악보다 더 큰 악과 폐해가 무력 사용으로 초래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 판단에서 현대 무기의 파괴력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하지만, 1700년 동안 이러한 조건에 맞추어 전쟁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도로, 정당한 전쟁론에서 시작된 전쟁이 과잉방어 차원으로 건너가면서, 침략전쟁이 되어 버렸고, 또는 정당한 전쟁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침략전쟁을 일으킨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다시 말하면, 정당한 전쟁론은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 대표적인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은 미국에 의한 이라크 전쟁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그 전쟁을 정당한 전쟁론에서 일으킨 전쟁이라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사람은 미국에 의한 이라크 전쟁을 정당한 전쟁이 아닌, 중동에서의 이권 때문에 미국이 일으킨 침략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정당한 전쟁의 4번째 조건, “현대 무기의 파괴력을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라는 문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과거의 정당한 전쟁에서는 한쪽 또는 양쪽의 생존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핵전쟁의 시대에서는, 정당한 전쟁론에 따른 전쟁은 공멸을 초래할 뿐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래서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이제는 정당한 전쟁론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6년 4월에,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와 팍스 크리스티(Pax Christi International)가 공동주관하여 ‘비폭력과 정당한 평화’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로마에서 개최하였다. 그 대회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80여 명의 평신도, 신학자, 평화운동가, 성직자, 연구자들이 참여하였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축사를 보냈으며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피터 픽슨 추기경이 기조 발제를 하였다. 그 대회에 참석한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함 패트릭 신부님은, 그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정당한 전쟁이 없다는 것을 믿는다”라는 최종 성명서를 채택했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정당한 전쟁론에 쓰는 에너지를, 어떻게 하면 국가 간에, 민족 간에, 정의로운 관계를 만들어나갈지에 관해서 써야 한다. 물론 그 정의는 자비를 머금은 정의이다. 국가 간에, 민족 간에 정의로운 관계가 있다면, 국가 간에, 민족 간에 전쟁은 없지 않을까? 그래서 오로지 평화만이 있지 않을까?

 

김성환 신부

예수회,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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