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8월 2일(연중 제18주일) 이사 55,1-3; 로마 8,35.37-39; 마태 14,13-21)

신과 맘몬을 구별하려면 그 사회를 작동시키는 기제가 무엇인지 파악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니 글로벌 시장경제니 하는 말은 그냥 퉁쳐서 돈이 핵심이고, 세상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겠다는 자본 이데올로기다. 많은 사람이 돈을 맘몬이라 여기는데 실상 ‘돈’은 그저 교환가치의 수단일 뿐 거기에 무슨 윤리적 가치나 힘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있다면, 돈을 절대적 가치로 욕망하고 숭배하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여전히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첫째 계명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도 반드시 지켜야 할, 그리고 지켜내야 할 제1계명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계명이 뜻하는 바가 바로 맘몬을, 아니 정확히는 맘몬을 제조해 내는 인간 욕망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절대적 위치를 점유하면서 상대적으로 인간이 제 존엄과 품위를 지키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하위의 노동자 계층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상위를 떠받드는 착취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다. 그들은 더이상 ‘휴먼’이 아니다. 그들을 밟고 서 있는 자들이 ‘휴먼’이다. 근대 자본주의를 이룬 이들 휴먼은 오늘의 졸부들이나 부도덕한 부유층과는 사뭇 달라서 절제와 교양을 갖춘 신실한 종교인이자 지식인이 주를 이루었다. 자본의 역사 속에서 ‘자본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고 지위를 획득한 이들은 자본주의를 윤리적이다 못해 정의로운 종교적 가치로 올려놓았고, 대중은 이들이 지닌 매력적 ‘라이프 스타일’을 욕망했다. 이후 자본주의는 교회의 암묵적 비호 속에서 갈등 없는 신관을 이루는 데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어디서도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실 수 있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장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현대인들은 더 이상 생산된 물건의 기능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상징하는 위세와 권력을 소비한다. 사람들이 명품에 환호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포스트 소비사회로 접어들게 되면서 욕망의 소비재는 물건에서 인간으로 건너간다. 소비 주체로 생각되었던 인간이 어느 사인가 상품이 돼 가는 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자신의 등급을 매기는 행위나 취직, 입학 등에 사용되는 ‘자기소개서’는 점점 더 스펙을 동원해야 하는 새로운 각축장이 되었다. 모두 자신을 구매하기 좋게 포장해서 내다 파는 시장이 된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xhere)

소비사회의 정의는 이런 필살의 노력들이 성공을 거둘 때에만 자기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결과물은 신의 축복이자 정의라는 이름으로 비호 될 것이다. 아마도 현대인들의 새로운 우울증은 팔려나가지 못한 제 자신의 등급에서 오는 병증일지도 모른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자신이 되어 보지 못한 채 대중의 트렌드로 소비된다는 것은 자못 우울한 일인 것이다. ‘트렌드’는 현대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소비적 가치다. 그래서 “나를 좀 소비해 줘”라는 짧은 단문에 현대인들이 갖는 집착과 비애가 한꺼번에 녹아 있다.

문제는 은폐다. 아무도 대놓고 ‘나를 소비해 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맘몬 역시 대놓고 맘몬이지 않으며, 맘몬을 따르는 신도들 역시 대놓고 ‘사이비’지 않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현대인들이 갖는 방황과 공허감을 제대로 간파했다. 이사야의 신은 보란 듯이 맘몬에 맞서 지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울 강력한 초대장을 내민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이사 55,1-2) 

그러나 하느님의 이런 호소는 자본화된 인류에게 뜬금없는 헛소리다. 아무도 이 획기적인 초대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무상성’이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에겐 어려서부터 달려온 단 하나의 레이스만 존재할 뿐, 그 끝이 무엇이 되었든 달려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멈추어 서서 잠시라도 ‘다른 초대’가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맘몬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맘몬은 사람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할까 봐 두렵다. 그래서 맘몬의 신도들은 이런 초대를 원천적으로 부정한다. 자본을 무효화시키는 이런 초대는 순진한 사람을 꾀어내 세계를 분열시키는 음모이자, 이단적 행위며, 선전포고다. 오늘, 그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이미 종교들의 신을 제압했다고 믿었는데 왜 여전히 예언자들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살아서 돌아오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우리는 예수로부터 이런 세계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발견한다. 빵의 기적은 맘몬이 들어설 수 없는 신의 세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 첫 번째를 여는 힘이 예수로부터 온다. 예수는 날이 저물기 전 아무것도 먹지 못한 군중들을 돌려보내야 한다는 제자들의 합리적 판단에 제동을 건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이 말씀은 너무 유명해서 따로 사족을 붙일 필요가 없다. 다만 제자들이 어찌해서 구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예수의 손에 건네지고, 예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는지, 감사의 기도를 바친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 떼어 주는 ‘나눔’이 시작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 

이 이야기를 움직이는 동력은 사람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 연민에 있다. 맘몬의 손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먼저 알아보고 그들이 우선이 되는 시선이다. 그래서 복음은 이 사실을 이렇게 입증한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21) 여기서 눈에 띠는 것은 ‘여자와 아이들’을 앞세우고, 장정을 그 뒤에 배치한 복음사가의 시선이다. 이것이 예수의 나라가 기적일 수밖에 없는 특징적 이유다. 그의 나라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아닌 것이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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