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2]

코로나는 코로나대로, 감기는 또 감기대로 나에게 주위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나를 포함하여, 세상이 모두 코로나를 어떻게 대처할 거냐에 대해 걱정하고, 조심하는 와중에도, 내게 자주 오는 손님, 감기는 여전히 나를 찾아왔다. 약간의 미열, 기운 없음, 그리고 콧물이 나는, 참으로 오래 앓아 온 이 감기를 만나면, 나는 당장 무장 해제가 된다. 그리고 나의 일상을 되돌아본다. 여지없이 이번에도 나는 나를 돌보지 않고, 주어진 일들을 해냈다. 그런데 그 일들이 싫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주어진 일들을 정말 즐기면서, 행복해 하면서 했다. 

이번에는 비행기를 타고 한국이나 베트남을 가지 않았고, 그저 다락방에 꾸린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수업을 했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성 피정을 진행했다. 하지만 한 주의 수업을 마치고, 또 4주간의 피정을 마친 금요일 밤부터 난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루를 꼼짝없이 쉬었다.

내게 감기는 언제나 이제는 쉬어도 좋다는 사인 같은 것이다. 어젯밤 피정을 마친 뒤, 자매들과의 깊은 대화에 감동을 받고, 내 맘은 벅차올랐다. 그래서 늦은 밤, 커피를 마시며 나와 함께 내적 여행을 한 길동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기억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밤부터 나는 감기를 즐기면서, 그 다음 날까지 하루 종일 느릿느릿 게으름을 떨었다. 그러니 아마 나는 감기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 될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그럼 코로나는 어떠한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나에게 쉬어도 된다는 사인인 감기가 걸려도 약을 먹으면서 일터에 나가야 하는 많은 사람을 나는 잘 모른다. 그리고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감기로 목숨을 잃는지 알지 못한다. 이번 코로나가 두려운 것은 무서운 속도로 감염된다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감기가 가볍게 쉬어 가게 하는 팔분 쉼표이듯이, 코로나는 어쩜 온 쉼표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빨래를 널다 팬데믹에, 우리가 불편해 하는 것들, 너무 익숙한 규칙들을 마치 빨래를 널듯이, 펼쳐 보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한다. ⓒ박정은

세상은 많은 의미와 부호를 가지고, 맞는 것과 틀린 것을 구분했다. 규칙을 만들고, 금을 긋고, 누구는 들어올 수 있고, 또 누구는 들어올 수 없다는 여러 가지 조항 등을 만들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잘 보이게 되는 코로나 팬태믹의 이 시점은 그런 것들이 혹시 너무 자기 중심적이고 자가 당착적인 몸짓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한다. 제도 교회도 결국 이런 상징과 규율로 가득 채워진 시스템은 아닌지 그래서 너무 번잡스럽게 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감기를 앓을 때면, 나는 약간 멜랑콜리해진다. 이런 멜랑콜리는 잃어버린 것 혹은 가질 수 없는,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잃어버린 데서 온다고 여성 심리분석가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야기한다. 그래서 모든 우울감은 신비주의와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시간표라는 기차에서 내려 바라보는 세상에는 새로운 계절이 보이기도 하고, 이젠 멀어진 친구의 뒷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그리스도를 찾은 모든 이를 멜랑콜리하게 하는지 모른다. 당장 달려가 교회 공동체에 헌신하고 싶은 우리의 발목을 잡는 이 상황이 짜증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우울함은 어쩌면, 우리에게 신비가가 되라는 초대인지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교회, 그리고 규칙들을, 마치 깨끗해진 빨래를 털어 햇빛 아래 널듯, 그렇게 펼쳐 내보이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요즘 한국사회를 달군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란의 한가운데는 신앙인들 사이에서 LGBTQ 공동체에 대한 불편함이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사실 각자 개인의 불편한 부분을 조금 내려놓고 보면, 법은 도덕률의 최소한이며, 도덕이나 율법을 넘어 사랑을 선택하기로 한 신앙인에게 왜 이 법이 불편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 이런 의문은 요즘은 내가 베트남의 예수회원들에게 인간의 성(Human Sexuality)이라는 신학 수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 민감하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수업에서 나는 젠더(the Gender)라는 것을 남성, 여성으로 구분하기보다는 스펙트럼으로 이해하는 현대의 접근법을 이야기했고, 성실하고 똑똑한 이 젊은이들은 잘 따라와 주었다. 

한낮의 소란이 물러간 저녁시간의 거리. 부드러운 소리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속에서.... 루이빌의 거리. ⓒ박정은

동성애를 포함한 모든 섹슈엘러티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가진 동등하고 거룩한 존재라는 것, 그래서 결국 정의의 문제와 직결됨을 이야기했다. 또 성과 관련없이, 미사를 거행하며, 양들을 먹이는 일, 식탁을 차리는 사제직은 여성적인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동의를 했다. 물론 개인들이 제출한 숙제에 자신은 동성애나 다른 성 문제가 불편하다는 의견도 있었고, 나는 그런 정직함에 대해 높은 점수를 주기도 했다. 또 어떤 학생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친구들이 수도회에 입회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함께 식별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기특한 이야기도 했다.

그리고 첫 주간의 마지막 주제로 여성 사제직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특히 최근 스위스의 한 영어권 교구가 총대리를 여성으로 선출했고, 프랑스 교회에 많은 여성이, 부제직과 사제직에 청원서를 제출한 현재 상황, 그리고 여성 사제직에 대한 교황 프란치스코의 부정적인 발언과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에 대해서도 공부를 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학생들에게, 여성사제직을 반대하는지, 찬성하는지를 정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토론 주제를 주었다. 반대하는 그룹은, “전통이므로 우리가 바꿀 수는 없으니 현재로서는 순명하자”라고 했고, 찬성하는 그룹은 “우리가 공부한 성 평등 차원에서는 여성이 사제가 되어야 한다”라고 이야기를 해서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그룹은, “예쁜 여성이 사제가 되면, 너무 아름다워서 정신을 놓게 되고, 그러면 하느님을 경배할 수가 없다”라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한참을 깔깔 웃고 나서 그에게, “여자도 그래. 잘생긴 남자가 사제가 되면, 황홀해서 정신을 놓게 되고, 그러면 하느님을 경배할 수 없어. 그러니 공평하게 정신 좀 놓자. 왜 여자만 하느님을 경배할 수 없게 하는 거니?” 하고 농담 같은 진담을 했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너희들이 반대하려면, 객관적으로 수긍이 가게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논리가 좀 더 정교해야 한다고. 

바람 속에도 아니 계시고, 불길 속에도 아니 계시고, 지진 속에도 아니 계시고, 오직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르시는 하느님. 산타 쿠르즈 바닷가의 한가로운 저녁 풍경. ⓒ박정은

솔직히 나는 개인적으로 사제직에 부르심을 느낀 적이 없다. 그렇지만, 누군가 부르심을 느낀다면, 나는 그 사람이 그 부르심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수도 성소를 통해 내가 누군가를 알아가고, 하느님을 배워 가는 것 처럼, 누군가는 성에 상관없이 자신을 알아 가고 하느님과 더 깊은 친교를 누리면 좋겠다. 누군가가 자신의 성소를 성의 이유로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솔직히 우울해진다. 그래서 더 사랑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또 이 코로나 시대에 엉뚱한 상상을 한다. 우리에게 낯선 것, 그래서 불편한 것을 한번 찬찬히 바라보면 어떨까 하고. 오늘 주일 말씀은 하느님은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고,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으며, 불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고 이야기한다. ‘이 사람은 틀리고, 이 사람은 우리에 속하지 않는다’ 하는 그런 날 선 소리 말고, ‘우리는 다르구나. 그래도 괜찮아’ 같은 부드러운 소리로 이야기하고 싶다. 감기가 내가 만든 규칙과 일 속에 힘든 나를 풀어 가게 하였듯이, 코로나 시대의 역동이 부드러운 하느님의 소리가 세상 한가운데에 들릴 것을 희망하는 나는 너무 현실성 없는 꿈쟁이가 되는 걸까? 그러나 그래도 나는 이런 꿈을 놓지 않는다. 꿈꾸는 일은 사람의 권리이니까.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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