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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인아!

기사승인 2020.08.13  11: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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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숙 수녀] 8월 16일(연중 제20주일)이사56,1.6-7; 로마11,13-15.29-32; 마태15,21-28

장마가 예사롭지 않다. 언제부턴가 날씨에 관한 한 꾸준히 “유례없는”, “모든 기상관측을 갈아엎는”과 같은 수식어를 달고 살기 시작했는데 이번 여름도 예외는 아니다. 여름은 긴 가뭄이 아니면 홍수로, 겨울은 한파 아니면 온난화로 고착돼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정상적이지 않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50일 넘게 쏟아지고 있는 물 폭탄은 모두 북극 빙하가 녹아서 온 결과라 한다. 기후 위기가 온 나라를 잠식해 들어왔다. 구멍 뚫린 하늘이 우울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런 염려는 곧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빠져나갈 것이다. 그리고 언 듯 파란 하늘이라도 내비칠 때면 다시 마법 같은 비책을 기대하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아픈 지구의 증세가 곧 내 병인 줄도 모르고서 말이다.

보고서(기후변동에 관한 정부간 패널. IPCC)에 의하면 100년 전 지구의 평균 온도는 대략 13.7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약 14.4도이니 1도가량 높아진 수치다. 수치만으로는 뭐가 큰 문제인지 잘 알 수 없을 텐데, 본시 지구 ‘1도’가 상승하는 데 수 천 년이 걸리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이고 비정상적인 수치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 2060년에는 2-3도 더 급증한다. 

예수는, 가나안 여인은, 망연자실 병든 지구를 끌어안고 그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며, 우리 등을 한껏 밀어내고 있다. ⓒ김수나 기자

지구 온도 ‘1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기 쉬운 방법은 우리 몸의 체온(36.5도)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우리의 정상체온(36.5도)은 1도 오르는 37.5도만 되어도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단박에 느낀다. 만일 2도 더 오르는 40도가 되는 날엔 온몸이 불덩어리로 바뀌고 당장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지구 온도 ‘2도’가 그런 의미다. 우리 몸의 체온 40도와 같은 불덩어리 수치다. 이쯤 되면 지구와 연결된 모든 생태 시스템이 고장 나고 붕괴될 것이 확실하다. 수십 억년 함께 해온 지구의 생명체들이 제대로 작별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멸종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지구 행성이 만들어진 이래 이보다 더 극한 파국이 어디 있을까.

온도가 오르는 전 과정은 생태계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고통스런 과정이 될 전망이다. 해마다 0.2도씩 올라서 0.5도가 되는 10년 후에는 세계인구 2천 4백만이 기후 빈곤층으로 떨어지게 되고, 다시 1도가 오르는 2040년엔 그 수가 수십억에 달한다고 한다. 지구촌 대부분이 식량은 물론 삶의 터전조차 담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시나리오를 멈추기 위해 온 국가가 전력 질주를 다한다 해도 현재의 임계점을 낮출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데 있다. 그런데도 가장 많은 이산화탄소 배출 국가들은 연일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지구에 가하는 테러가 곧 자신의 어머니요 누이에게 가하는 것이고, 지구의 체온이 제 몸의 체온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달으면, 그때 가서 이 모든 야만적 행동들을 멈출까, 의문이다.

오늘은 끝이 보이지 않는 해답을 희미하게나마 가나안 여인으로부터 찾고 싶다.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마태15,24) 이라는 예수의 매몰찬 거절에도 그녀는 마침내 예수를 되돌려 세우는 데에 성공하지 않았는가. 아마도 성경을 통틀어서 여인이 주도권을 쥐고 예수의 구원을 끌어낸 경우는 이 복음서가 유일해 보인다. 예수의 행적을 담고 있는 복음서치고 이처럼 낯선 예수를 만나보기도 힘들지만, 또 이처럼 대담하고 굽힘 없는 여인을 만나기도 힘들다. 기적이 일어날 수 없는 불모의 땅에서 자비를 베풀라는 여인의 요구는 차라리 간청이 아니라 명령에 가깝다.(22)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26)며 거부하는 예수의 발언은 모욕에 가깝다. 그래도 여인은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 라는 말로 응수한다. 비록 수 세기에 걸친 장벽이라 해도 여인에게서 그것은 장벽이 아니다. 그녀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고, 오를 수 없다고 여긴 불가능의 벽을 넘어 예수에게로, 예수의 중심을 파고든다. 오랜 과거의 하느님 나라를 미래로 밀어내는 데에 이스라엘과 이방의 지역이 따로 있으며, 남자와 여자, 높은 지위와 낮은 지위, 주인과 종, 식탁 위와 식탁 아래가 따로 있을 수 있겠는가? 죽어가는 딸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어떤 난관이라도 불사할 것이다. 그녀에게 “이건 안 돼” 하는 일이란 없는 것이다. 그 힘이 그녀를 밀어붙이는 모든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사랑이요 믿음이다. 마침내 여인이 장벽을 부수고 예수를 움직였다. 예수의 감탄이 넘치도록 생생하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

예수는, 여인은, 지금 우리가 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우리 등을 한껏 밀어내고 있다. 망연자실 병든 지구를 끌어안고 그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며, 저 여인처럼 행동하는 현재만이 과거와 미래를 구할 수 있다며, 한걸음, 한걸음 미래를 부수며 나갈 것을 명령한다. 그래야 아이들의 미래를 악령의 손에서 구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것은 낙담하지 않을 용기다. 순순히 물러서지 않는 여인이 돼서 파괴자들의 손에 잡힌 상처 난 딸, 부서진 지구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 함부로 절망적인 속단은 금물이다. 그런 말은 우리가 대면해야 할 현실을 놓치게 한다. 그보다는 고통스럽더라도 세계를 직면하고 좌고우면 않는 사람들을 독려해야 한다. 대멸종의 날, 울며불며 하느님, 부처님, 알라를 찾으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세상의 모든 종교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선교 1순위를 재검토해야 한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강신숙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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