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가톨릭평론> 2020년 7-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지난 5월 경주시가 자매결연 도시인 일본의 나라시와 교토시에 각각 방호복 1200세트와 방호용 안경 1000개씩을 보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에서는 금세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경주시장은 “어려울 때 돕는 것이 진정한 친구이자 이웃”이라며 “지금은 일본이 우리보다 방역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 대승적 차원에서 지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2016년 경주가 지진 피해를 입었을 때 자매도시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사실을 상기했지만, 비판은 잦아들지 않았다. 시장은 ‘토착왜구’, ‘쪽발이’, ‘정신 나갔냐’라는 욕설을 들었고, 경주시 홈페이지에는 “경주시가 일본이냐”, “일본 지원해주라고 세금 보내고 경북에 후원금 보낸 줄 아냐”, “경주시로 수학여행과 관광을 가지 않겠다”며 항의하는 글이 연이어 올라왔다. 나라와 교토에 이어서 일본의 다른 자매결연 도시와 우호도시 세 곳에 방호 물자를 보내려던 계획은 결국 취소되었다.

해외에서 코로나19 방역 선진국 한국에 관한 이른바 ‘국뽕’에 가까운 기사를 매일 접하던 나에게 이 소식은 충격이었다. 천년 고도 경주가 자매 도시인 일본의 옛 도시에 방역 물자를 보낸 것이 박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비난거리가 되다니! 반일 감정이 한국민 일반의 정서를 보여준 것인지 일부 언론에 의해 증폭되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아마 일본의 수출 규제로 촉발된 최근의 한일 외교 갈등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 ‘가깝고도 먼 나라’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일까?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두 나라 사이의 어둡고 무거운 과거는 청산도 극복도 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해방 이후에 진정한 화해의 시도가 없었던 탓에 두 나라의 (일부) 국민 사이에 알게 모르게 반일과 혐한의 감정이 누적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화해가 가능하려면 양국 정부 차원에서 큰 걸음을 내딛고 새로운 한일 관계가 정립되어야 하겠지만, 당장은 어려워 보인다. 일본 아베 정권의 배타적 민족주의/국가주의적 성향은 이미 잘 알려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국에서도 “총선은 한일전”이라는 구호가 집권당 후보의 선거 포스터에 등장했고, 지지자들은 ‘토착왜구 축출’ 같은 자극적인 말로 유권자의 반일 심리에 호소했다. 집권 세력이나 그 지지층이 정치적 정파적 계산으로 반일/혐한 감정을 부추기거나 그것을 이용하려는 발상은 대단히 좋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 시민의 직접적인 만남과 교류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더 커졌다. 정부 사이의 관계가 한일 관계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 많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꾸준히 이해와 우정을 쌓아간다면, 결국 정부까지도 움직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영등포가 고향인 일본 신부님

내가 처음 일본에 간 것은 1983년 겨울, 대학 3학년을 갓 마쳤을 때였다. 나를 초대해 주신 분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서 태어난 일본인 오카 히로시 신부님. 그분이 사목하는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의 도코로자와시에 갔고, 신부님의 인솔로 일본 젊은이들과 함께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콜카타를 3주가량 다녀왔다. 이어서 나는 한 달 정도 일본에 머물렀다.

당시 일본에는 한국인 유학생이 무척 적었다. 내가 찾아간 와세다대학교에는 통틀어도 5명이 채 되지 않았고, 예수회의 조치대학교(上智大學校, Sophia University)에도 한국 학생은 거의 없었다. 아직 한국인들의 해외 관광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이었고, ‘한류’가 생기기도 훨씬 전이었다. 함께 방글라데시를 다녀왔던 친구가 교사로 있는 초등학교를 방문했는데, 아이들이 한국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우라와교구 소속인 오카 히로시 신부님은 고향이 서울 영등포다. 조선에서 나서 자란 그가 중학생일 때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찾아왔다. 물론 조선인에게는 해방이었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들은 자칫 신변의 위험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때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약품상의 조선인 직원 한 사람이 야간에 안전하게 제물포까지 가서 일본행 배를 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렇게 가족과 함께 아버지의 고향인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그는 그렇게 일본 땅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뎠다.

여러 해 뒤에 그는 가톨릭 신자가 되었고 프랑스 신부들에게 언어와 신학을 배우고 사제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세례를 받았다. 나서 자란 고향을 잊지 못한 오카 신부님은 프랑스 떼제를 방문했을 때 “한국과 일본의 화해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수사들에게 조언을 청했다. 로제 수사는 “일본 젊은이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 청년을 일본으로 초대해 보시라”고 했다. 그는 이 제안을 실행에 옮겼고 서울에 사는 떼제 수사들의 소개로 내가 일본에 가게 된 것이다.

영등포에서 태어난 오카 히로시 신부는 몇 차례 일본 청년을 데리고 한국을 찾았다. (사진 제공 = 가톨릭평론)

오카 신부님의 인솔로 일본 젊은이들과 함께 인도와 방글라데시를 방문하면서, 또 그 뒤로 신부님의 본당에 머물면서 나는 나라와 문화의 경계를 넘는 교회의 보편성을 깊이 체험했다. 사제관에는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부모들도 돌보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함께 살았고, 이 아이들은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가난한 지역과 한국을 찾아가는 여행에도 동행했다. 겸손하고 소탈한 신부님의 모습처럼 조립식 건물로 지어진 아주 소박한 성당에는 문턱이 없었고, 많은 비신자가 자연스럽게 드나들었다. 대부분 신자가 아닌 주민들이 성당 회의실에서 단(알콜)중독 모임을 했고, 방글라데시에 자원봉사자를 보내고 후원하는 활동에도 대거 참여했다. 매일 아침 신부님과 함께 프랑스와 일본인 수녀 3명이 사는 작은 공동체를 방문해 고타츠(일본식 난로) 주위에 둘러앉아 함께 드리던 미사도 잊을 수 없다. 오카 신부님은 일본 젊은이들을 데리고 한국도 몇 차례 방문했다. 서울의 쓰레기 매립지가 있던 난지도와 용산의 노숙자 쉼터, 광주와 목포, 대구 등으로 순례했다. 여기에는 한국 청년들도 함께했다.

신부님이 서울에 오시면 적어도 하루는 온종일 영등포의 거리를 천천히 걸으시곤 했다. 처음에 나는 그분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으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영등포는 해방 전과는 너무도 많이 변해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다른 동기가 있었다. 신부님이 영등포에서 찾으려 한 것은 해방 직후 가족이 한국을 떠날 때 도와주었던 그 조선인 직원이었다.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고 싶어 혹시라도 길에서 그를 우연히 마주칠까 해서 영등포 거리를 서성이셨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주요 일간 신문에 기사로 낸다면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며 그분의 손목을 끌었다. 하지만 신부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자녀/손자녀들은 아버지/할아버지가 일본 사람 밑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는데, 찾고 만나는 과정에서 행여나 그분의 입장을 난처하게 할지 모른다”는 이유였다. 나는 이 사려 깊은 태도 앞에서 신문사행을 더 권하지 못했다. 오카 신부님은 끝내 그 은인을 만나지 못했다.

게이코를 울린 한국 대학생들

예수회가 도쿄에 세운 명문 조치대학교 국제관계학과를 졸업한 게이코는 1984년 봄 학기에 서강대학교 사학과에 교환학생으로 왔다. 도쿄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서울로 갈 준비를 했고 이미 한국말을 잘했다. 한국에 온 뒤로 한국 학생들과 아주 잘 어울렸다. 한국 학생들은 생김새도 비슷하고 성격 좋은 이 일본 학생을 마치 한국인처럼 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 학생들 여럿과 함께 밥과 술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일본에 대한 한국 학생들의 비판과 공격이 심할 정도로 집요해서 결국 게이코를 울게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고 전해 들었지만 분위기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외국인 학생들이 아주 적었던 대학사회에서 민족주의가 만연하던 시절이었다. 20대 초중반의 한국 학생들은 일본에서 온 교환 학생에게 일본의 모든 역사적 과오와 범죄에 대한 인정과 사죄를 기대하는 듯했다. 그 가운데는 군대에 갔다 온 선배들도 있었다. 비록 한국을 사랑하고 이해하려는 사람이지만 일본은 게이코의 나라였다. 당시에 한국 학생들은 그것을 헤아려 주는 법을 몰랐다. 우리와 친구라면 ‘우리 편’이 되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일본인으로서 그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은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게이코가 한국 학생들과 어울리는 자리를 좀 부담스러워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어쩐지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를 만나면 누군가를 대신해 사과하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휴학생 신분이었고, 이윽고 서울을 떠나게 되어 다시 만나지 못했다. 게이코는 그 뒤에 <요미우리신문>의 기자가 되었고 서울 올림픽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그때 이미 프랑스에 와 있었다.

“일본 사람과는 함께 밥을 먹을 수 없어요”

스물한 살 대학생이었던 그해 겨울의 일본 체험 이후, 나는 어떤 모임에서건 일본 사람을 보면 먼저 다가가 말을 건네리라 다짐했고 지금까지 그렇게 하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인을 보면 꼭 먼저 다가가 말을 거는 일본인을 만났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일본인 교회와 동아시아 선교단체에서 일하는 파울 슈나이스 목사의 부인 교코 사모다. 나한테 큰누나뻘 되는 화통한 성격의 이분과는 처음부터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여러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그분은 내게 이런 체험을 들려주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 다짜고짜 말을 걸면 놀라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좋은 대화로 이어져요. 그런데 한번은 나와 상종도 하지 않으려는 분을 만났지 뭡니까. 어떤 국제 모임에서 마주친 한국인 여성 교수였어요. 반가운 마음에 식사 시간에 말을 붙여 보려고 같은 테이블에 가서 앉으며 인사했지요. 그러자 이분이 아무 대꾸도 없이 식판을 들고 다른 테이블로 옮겨가는 겁니다. 나도 식판을 들고 따라갔지요. 그렇게 하니까 이분이 다시 일어서서 다른 곳으로 옮겨 앉아요. 나는 포기하지 않고 따라갔지요. 이러기를 몇 차례 하고 나서 내가 물었지요. 나는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은데 왜 피하느냐고요. 그제야 그분이 내게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일본 사람과 도저히 한 자리에서 식사할 수가 없어요!’ 그분은 친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전라도에서 일본 헌병에게 맞아서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생긴다.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는 어떤 이들에게는 오늘도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조그만 체구의 교코 사모님은 정말 야무진 분이다. 이분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남편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동반하고 지원하고 증언했다. 독일 선교단체에서 일본으로 파송되어 일하던 중에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참혹한 실상과 진실을 세계에 알린 분이기도 하다. 우리가 함께 참가한 어느 해 한독 기독인 세미나의 마지막날 저녁 친교의 시간. 한국 사람과 독일 사람들이 번갈아 노래를 부른 다음 참석자 가운데 유일한 일본인이었던 그분이 자청해서 마이크를 잡았다. 전쟁에 나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노래였다. 애절한 가락의 노래를 마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어머니든 일본 어머니든, 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낸 어머니의 마음은 똑같아요!”

세대를 뛰어넘어 이루어진 치유

희경(가명)은 유럽의 한 나라에 유학해서 박사 과정에 있었다. 어떤 세미나에서 내가 창세기의 요셉과 형제들의 이야기, 갈등과 위기, 화해에 대해 강의했을 때 그를 만났다. 사석에서도 가족과 관련한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갔던 것은 유교 전통이 강한 가족과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그였지만 연애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사귀는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결혼을 고려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교제가 진행되지 않았고 결국 헤어지게 된다고 했다. 왠지 모르게 남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졌다. 그러고 나서 2년쯤 뒤였을까? 다른 세미나에서 희경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내게 놀라운 사실을 들려주었다.

“저는 제 문제의 뿌리를 찾았어요! 우리 가족사와 연결된 것이에요. 아버지는 늘 바람을 피워 어머니를 힘들게 했어요. 어려서부터 그런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사춘기를 거치면서 아버지에 대한 반항과 원망, 미움이 제 안에 쌓였고 그 때문에 남자에 대한 불신이 자라났던 것 같아요. 사람을 좋아하다가도 결혼하려고 하면 상대가 신의를 지킬지 자신이 없어졌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저는 우리 가족사의 비밀을 알게 되었어요. 바로 제 친할머니가 일본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할아버지는 일본 유학생 시절에 일본인 여성과 연애했고, 해방되자 그를 데리고 고향 마을로 돌아왔어요. 할머니 뱃속에는 벌써 아버지가 잉태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아버지를 낳자마자 가족과 문중에서는 할머니를 일본으로 돌려보내고, 집안의 종손인 할아버지를 조선 여성과 결혼시켰어요. 제 아버지는 그 할머니를 친어머니로 생각하며 자랐어요.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가끔 무언가 잘못하면 삼촌들이나 주위에서 ‘왜년의 아들’이라 했는데, 처음엔 그저 놀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대요. 친어머니의 품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아버지는 방황했고, 어른이 되고 결혼한 다음에도 외도를 계속했어요. 늦게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뒤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연민으로 바뀌었어요.”

더 놀라운 사실은, 희경이 일본으로 가서 아버지의 생모, 자신의 할머니를 만났다는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온 유학생을 사랑해서 그를 따라 조선에 갔고, 그 남자의 아이까지 낳았지만 일본으로 쫓겨 갔던 할머니.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에 찾아온 한국 손녀와 일본 할머니의 만남. 두 여성에게 이 만남은 얼마나 큰 위로와 치유가 되었을까? 경상도의 종가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에 화해하지 못하고 깊은 상처로 남았던 것이 긴 시간이 지나고 세대를 건너뛰어 이해와 사랑으로 열매 맺은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희경은 그 뒤에 박사 공부를 마쳤고 결혼해 남편의 나라에 정착했다. 그가 사는 도시에 갔을 때 나는 전화로 안부를 나누며 축복해 주었다.

자이칸과 자이니치, 경주와 교토의 양로원

일제 치하에서 일본 남성과 결혼한 한국 여성이나,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광복 직후 조선에 있던 일본인 남성은 조선인 아내, 자식들과 함께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었지만, 조선인 남편을 둔 일본인 아내는 가족과 함께 돌아갈 수 없었다. 일본 여성들은 남편의 호적에서 자유로워져야 귀국이 가능했으나, 그때도 자식은 데려갈 수 없었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사람은 얼마였을까? 광복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은 200만 명에 달했고 내선일체(内鮮一体)라 해 결혼이 장려되었다. 남자 장정의 다수가 전쟁터에 나갔을 때라 일본에 일하러 온 조선 남성과 일본 여성의 만남과 결혼은 어쩌면 자연스러웠으리라.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1945년 해방 이후 조선인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온 일본인 아내는 약 5000명이다.

그런데 대부분 일본인 아내는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희경의 할머니처럼 시댁에서 쫓겨난 사람도 많았고, 남은 사람도 갖은 아픔을 겪었다. 한국전쟁 동안, 특히 중공군이 들어왔을 때 일본인들은 더 큰 고초를 당했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아픔을 한국과 일본은 오랫동안 잊었거나 외면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한국 호적에 편입된 일본 여성들은 일본 호적이 말소되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돌아가기도 쉽지 않았다.

고(故) 김용성 씨는 일본 여행 중에 한국 여권을 지닌 일본 여성들이 일본국적 회복을 요구하는 시위를 직접 보고 나서 1972년 경북 경주에 나자레원을 설립했다. 처음에는 일본 여성이 본국에 돌아가는 것을 도와주는 일을 했으나, 일본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할머니들을 위한 요양원으로 탈바꿈했다. 할머니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삶을 마쳤고, 이제는 몇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외면받은 그들 역시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의 피해자였다.

2년 전 교토에서 동북아시아 그리스도인 화해 포럼이 열렸을 때 재일교포들이 지내는 양로원을 방문했다. 과거에 조선인이 많이 살던 교토의 빈민촌 자리였다. 이사장 윤기 씨는 죽은 지 13일 만에 발견된 재일교포 1세 노인에 관한 기사에 충격을 받고 일본 땅에서 아무 데도 의지할 곳 없는 재일 한국/조선인을 위한 양로원을 세우고 ‘고향의 집’이라 불렀다.

윤 이사장의 어머니는 한국 목포에서 30년 동안 3000명의 고아를 헌신적으로 돌본 윤학자 여사(일본명 다우치 지즈코)다. 그는 한복을 즐겨 입고 한국인처럼 사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우메보시(매실장아찌)가 먹고 싶구나” 하신 것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징용으로 끌려와 평생 노동판을 전전하다 홀로 숨진 재일교포 노인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김치가 먹고 싶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나자레원’에 남은 일본인 할머니들과 ‘고향의 집’에 사는 재일교포 노인들은 자이칸(재한 일본인)과 자이니치(재일 한국/조선인) 가운데 가장 연장자들이면서 코로나19 팬데믹 시절에 가장 취약한 이들이다. 어쩌면 지난 몇 달 동안 이곳에는 외부인의 방문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20세기의 제국주의와 전쟁의 희생자들인 이분들은 두 나라에서 곧 잊혀질지도 모른다. 경색된 한일관계 속에서도 경주시가 교토시에 보낸 방호 물자가 두 도시를 연결해주는 우정의 작은 징표가 되었기를 바라며, 나는 ‘나자레원’과 ‘고향의 집’에 계신 분들을 기억하고 싶다.

평화와 화해의 순례

상대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진정한 연대와 화해의 길이 열리지 않을까? 전쟁은 한국인들만을 희생자로 만들지 않았다. 일본의 ‘히바큐샤(被爆者)’(원자폭탄 피해자)들이 한국에 와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했다. 얼마 전 유명한 성폭력 피해자/생존자인 일본의 이토 시오리 기자와 한국의 서지현 검사의 만남과 연대도 많은 울림을 주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세워가려면, 두 나라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특히 여성과 젊은이들이 서로 이해를 넓히고 우정을 키워 나간다면 더 큰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와 수도회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한몫을 담당할 수 있으면 좋겠다.

2013년부터 매년 동아시아 젊은이 모임과 순례를 진행하면서 나는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이 중국, 타이완, 홍콩 등 이웃 나라 젊은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노래하고 대화하고 걸으면서 얼마나 많은 우정을 키워가는지, 또 이런 만남과 사귐이 서로에게 얼마나 큰 힘과 용기를 주는지를 봐왔다. 특히 일제 군국주의의 수많은 흔적과 4·3 유적지가 있는 제주도에서 두 차례 가졌던 ‘평화와 화해의 순례’는 일본 젊은이들이 전혀 몰랐던 역사에 눈뜨게 했고, 한국과 일본 청년들을 더욱 가까이 이어주었다. 젊은이들은 기성세대가 전해주었거나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오해와 편견을 이런 기회를 통해 넘어선다.

동아시아 청년들의 평화와 화해의 순례, 2019년 5월 제주 알뜨르 비행장에서. ©가톨릭평론

무겁고 어두운 과거사와 연결되었던 나라를 ‘내 친구가 사는 나라’로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변화다. 한국의 젊은 세대는 조부모나 부모들과는 달리 일본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인 열등감이 전혀 없다. 이들은 또 민족이나 국가와 개인을 구분해서 볼 줄도 안다. 두 나라 사이의 역사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미래지향적인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한국과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일본에 친구를 더 많이 만들고, 이들이 일본의 여론과 정책을 바꾸도록 긴 안목에서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더 많은 친구가 생기면 좋겠다.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친구가 되어주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은 없다. 친구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화해다. 그리고 화해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다.

신한열

떼제공동체 수사. 대학을 졸업하고 잠깐 직장생활을 한 뒤에 1988년 프랑스 떼제공동체에 가서 1992년 종신서약을 했다. 떼제에 살면서 국제 청년 모임을 조직하고, 매년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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