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9월 2일, 강정 구럼비가 닫히던 날로부터
올해 9월 2일은 제주 강정 해군기지 공사를 위해 끝내 마을에 펜스가 둘러진 날로부터 9년째인 날이었습니다. 강정마을 주민으로 살고 있는 엄문희 씨가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기록을 기고해 왔습니다. - 편집자 주 |
볼 수 없게 하다
9년 전 9월 2일. 제주 강정마을 해안에 해군기지 공사를 위한 펜스가 세워졌다.
사람들은 구럼비에서 쫓겨나 갇혔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오늘. 강정마을 할망물 식당의 종환 삼촌이 간암으로 수술을 받고 있다. 그는 구럼비 가는 길이 그런 식으로 막히기 전부터 용천수 떠다가 마을에 찾아오는 사람들 밥을 지어 주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10년 넘게 매일 밥을 지었지만, 본인은 정작 밥을 먹지 못했다. 해군기지 건설과정의 무자비한 폭력을 겪어낸 마음의 병이 그의 몸을 갉아먹고 있단 걸 알면서도 어쩌지 못했다.
그는 언젠가 교도소 수감 시절에도 구럼비 바위에 걸터앉아 큰 그릇 무릎에 올려놓고 밥 먹던 사람들을 꿈에서 보곤 하였다고 했다. 구럼비를 ‘본’ 사람들은 떠나지 못했고, 국가를 ‘본’ 사람들 역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그가 말한 그 ‘보았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너무도 알 것 같아서 집에 돌아가 엎드려 울었던 적이 있다.
마을에 불어닥친 해군기지 문제는 바다로 가는 길을 모두 차단한 높은 벽과 똑같은 작동원리를 가졌다. ‘볼 수 없게’ 하는 것. 여기 주민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 채 문제를 떠안게 되었고, 일방적으로 권력이 구획한 담에 갇혀서 국가를 두려워하도록 강요당했다.
내가 처음 마을에서 살겠다고 왔던 2015년엔 마을 전체가 크고 높은 펜스에 갇혀 마치 미로 같았다. 바다 쪽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구럼비로 가던 길에 '구럼비로 가는 입구'라고 썼다. 범섬이 보였던 위치마다 '범섬이 보이던 곳'이라고도 썼다. '할망물 가는 길'도 있었다. 장벽으로 가로막은 진실을 되살리기 위해 사람들은 펜스 높은 벽에다 '생명 평화 강정 마을'이라고 썼다. 이따금 담 너머로 폭발음이 들리고 땅을 흔드는 진동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벽 너머에 그리운 것들을 남겨 두었다. 그것이 섬이나 바위의 이름으로 표현되었지만 그것은 빼앗긴 자유와 존재의 권리였기 때문에 우리가 되찾아야 할 이름이기도 했다.
그래도 담 너머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시절이 나았다는 것을 해군기지 준공식 때 알았다. 보이지 않아서 우리는 상상할 수 있었고, 포기하지 못했던 것 같다. 보이지 않았으므로 견뎠다면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2016년 2월 해군기지 준공에 맞춰 높고 큰 펜스가 걷히던 날, 사람들은 너무도 달라진 풍경에 망연자실하여 멈춰 서 있었다. 얼음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던 담장이 철거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담장의 시대가 새로 열린 것을 목격했달까.
우리는 줄곧 그들이 만든 벽, 혹은 법, 혹은 자격, 혹은 이름 바깥에 존재했다.
타자(the Other) 그리고 식민지
2020년 여름 막바지, 마을 곳곳에 마을회 공고가 붙었다. 해군참모총장이 8월 31일 강정마을에 와서 사과한다는 내용이었다. 내용을 보면 “마을회는 해군으로부터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아내기 위한 명예회복 분과를 구성해서 노력해 왔고, 그 결과 해군참모총장이 8월 31일(월) 오후 2시 강정마을을 방문하여 해군기지 건설과정에서 빚어진 마을공동체파괴에 대해 주민들에게 사과할 것이니 참석을 희망하는 주민은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사과받을 자는 신청하라”는 말도 이상했지만 신청자격은 “향약상 주민”뿐이라니 웃음이 나왔다. 왜 사과받을 권한이 ‘향약상 주민’뿐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사실 설명은 항상 없었다. 그러나 단서는 항상 붙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2018년에는 “해군국제관함식 유치를 찬성해주면 사과하겠다”고 했다. 군사시설보호구역 확대에 동의한다면 사과하겠다는 의미다. 아름다운 이름, ‘민군 상생’에 관한 협약이라면서 군이 지역개발계획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서 강정마을만, 그것도 향약상 주민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사과란 대체 무엇인가. 대통령이 사과했고, 해군참모총장이 고개를 숙였지만, 실제론 마을의 분열과 저항자들의 투항을 전제로 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부석종 해군참모총장의 사과문 첫 문장이자 대상 호명의 언어는 “강정마을 주민 여러분”이었다. 국가 폭력으로 삶이 온통 부서진 사람들을 향해 “잘 아시는 것처럼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은 (....) 평화를 지키기 위해 건설되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이 가닿는 곳은 “숭고한 국방의 의무”였다. 여러 차례 “제주 출신인 제가”라고 했고, “제주에서 나고 자란 제가 참모총장으로서 이 일을 매듭짓고 새로운 상생의 길을 여는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자 합니다. 저를 믿어주시고”라고도 했다.
호명, “강정마을 주민 여러분”이라는 말은 무엇을 은폐하는가? 첫째, 그것은 해군기지 문제를 강정마을과 그 주민만의 문제인 것처럼 속여서 문제의 당사자들을 최소화하려는 오래된 전략을 은폐한다. 둘째, 해군기지 문제를 건설과정 당시의 문제인 것처럼 은폐하고 있다. 국가가 자행한 폭력 문제는 강정마을만을 지목한다. 국가는 줄곧 국책사업으로 용도가 변화하는 토지와 토지주만을 이해당사자로 지목하고 다른 의견과 질문을 외부화했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는 저항의 크기를 최소화해서 사업 유치에 성공했고, 사업 이후에도 해당 지역을 계속 갈등에 빠뜨려 이차 이득을 얻어내곤 하였다.
마을과 해군의 대표가 반복적으로 내놓는 말, “제주 출신”이라든지 "순수하게 강정을 지키고자" 또는 "강정만을" 같은 말들의 위험은 논리와 상식으로 일하지 않겠다는 비열한 자기선포와 같다. 출신성분을 따지는 자들은 그것 외에는 자신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자신을 신뢰할 만한 존재로 부각시키는 전략을 세운다. 정말로 그날 두 사람은 "나를 믿어 달라"고 했다. 이런 자들이 이다음에 하는 말은 역사적으로 "나중에" , "기다려 달라", "가만 있어라"였다는 걸 우리는 안다. 이미 그 시간대에 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다음은 무엇일까? 그 또한 이미 도달해 있다. 그것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원인에 배후가 있다는 식이다.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자, 믿지 않는 자들은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거나 출신성분이 달라서다. 선량한 강정마을 주민들이 외부세력에 속아서 이 꼴이 났다는 바로 그 말, 그냥 애초에 나쁜 피를 가진 더러운 것들. 외부세력, 바로 타자(the Other)가 아닌가.
국가적 사안을 해당 지역에 사는 피해 당사자만의 일로 고립시켜 분할통치하고, 질문하는 시민들을 비국민처럼 몰아 ‘타자화’하는 것은 국민을 선동으로 속일 수 있는 열등한 대상으로 보는 국가의 우월감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국가에 의한 일방적 호명은 ‘타자화 전략’이며 ‘식민’의 문제다. 오늘 강정마을회장과 해군참모총장이 똑같이 사용한 기제가 실은 교묘하게도 ‘식민지 전략’인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국가에 동원된 마을의 문제도 함께 있다. 마을이 국가의 개발주의를 내면화하며 국가를 대리하는 현상이 낯선 것은 아니다. 이미 강정마을은 향약이라는 공동체의 자치규약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마을 주민 일부를 도려냈다. 전통적으로 마을은 정신적, 물질적 공동체성 테두리를 공유한 집단이었고 국가로부터 일정 부분 독립적인 단위였다.
향약이 인정되는 것은 오랜 시간 공동체의 형편에 따라 조정되어 온 경험과 가치가 법보다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 자치규약이 오랜 시간 함께 싸웠고 이제 주민으로 살아가는 이웃들을 주민의 권리 밖으로 내쫓는 도구가 됐다. 이제 마을은 근대적인 국가 권력에 포섭된 최말단 행정기구나 다름없다. 행사가 끝난 뒤, 민군 상생협약 간담회를 위해 한 무리의 군복과 사복 남성들이 마을회관 안으로 들어갔고 곧바로 문이 잠겼다. 문 안에서 사람이 드나들 때마다 문을 다시 열고 잠그고를 반복했다. 이제까지 저들은 모든 일을 이렇게 했다. 비밀리에. 그들만이.
한때 국가에 의해 철저히 타자화되었던 강정마을은 이제 유일한 당사자를 자처하며 해군기지 문제를 전유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 방식이 바로 제국주의 전략이었던 것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더라면 군사기지와 협력 관계를 갖는 것에 질문하며 동료 시민들과 먼저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고, 마을은 민군 개발 협력 시대를 열었다. 과거엔 책임이 없을지 몰라도 앞으로 올 시간은 역사적 책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만의 세상
해군참모총장 부석종 씨가 ‘강정마을 공동체 파괴에 대해 사과’하러 왔던 날, 쇠약한 몸으로 입원하러 가던 김종환 삼촌은 기어이 점심을 차려 놓았다. 그 밥을 먹는 사람들은 마을 복판에서 10년 넘게 추던 춤을 췄다. 국가가 주민을 주변으로 돌려놓으며 그들의 질문을 묵살하고 담장을 둘러 질문을 폐쇄했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담장을 허문다. 권력에 의해 타자로 전락했던 사람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갖는 존재가 되어 끊임없이 ‘우리’가 됨으로써 폐허를 응시한다.
9년 전 9월 2일. 어떤 세계가 다른 세계에 의해 앞이 가로막힌 첫날이다. 오늘은 9년 전 국가가 폭력을 총동원해 한 마을을 희생시키고 일방적으로 높은 벽 미로에 가둔 날이다. 그러나 우리는 재난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사회를 찾아냈다. 이야기는 끝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은 국가의 일원이나 국민이 아닌 자들의 이야기다.
- 2020년 9월 2일에
엄문희(멸치)
강정평화네트워크 활동가. 2015년 12월부터 강정마을에 살고 있다. 처음엔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여성들을 기록하고 싶어서’ 1년 살이 계획으로 8살 아이와 마을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마을은 국가폭력으로 너덜해진 곳이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광경에서 절망적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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