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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존엄과 모멸

기사승인 2020.09.22  13: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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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실린 글입니다.

 

하비 밀크. (이미지 출처 = CNN 'Harvey Milk: The pioneer politician' 영상 갈무리)

하비 밀크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힌 미국 최초의 정치인이다. 한국전쟁 때 해군에서 복무했고 고등학교 수학교사를 했으며, 월 스트리트의 보험회사에서 통계분석가로 일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카메라 가게를 운영하며 주거운동과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참여하다, 1977년에 그곳 시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오십이 다 되어 인권운동가가 되었다. 영화 <밀크>는 매사 무관심했던 중년의 히피가 미국 사회의 변화의 상징으로 바뀌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는데, 무척 감동적이다.

밀크의 역할로 나오는 배우 숀 펜(Sean Penn)은 주류 사회로부터 완전히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 한 동성애자의 영혼과 정신이 이성애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태연하게 보여 준다. 밀크는 숨어 지내는 성소수자들에게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먼저 알리기를 촉구했다. 그래야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혐오의 주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위에서 밀크가 ‘공개적으로’ 동성애자로서의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혔다고 했다. 나는 여기서 생애 처음으로 내가 이성애자라는 것을 밝힌다. 나는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내 성 정체성이 이성애자라고 말한 적이 없다. 나는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것을 왜 그 사람은 밝혀야 하는가? 왜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이 될 수 없는가? 삶의 역동성과 갈망을 부정하게 하고, 불구로 만드는 폭력은 밀크만 죽게 만든 것이 아니다. 어느 때든 어느 곳이든 벌어진다. 다른 인종, 다른 종교, 다른 계층, 다른 성별, 다른 신체는 매일매일 죽는다.

1900년대 초,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가장 심도 있게 탐색한 두보이스(W.E.B. Du Bois)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왜 내 신체의 한 특성만이 특별히 문제가 되고, 다른 특성들은 문제가 안 되는가? 자신의 피부색 하나가 다른 모든 사람과 나누고 있는 공통의 특성을 압도한다. 이 비뚤어진 추정에서 억압과 부정의가 생겨난다. 신체적으로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가 흑인을 ‘문제’로 만든다. 두보이스를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도, 그는 묻는다. 내가 도대체 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

두보이스의 경험은 성소수자들의 경험과 매우 가깝다. 동성애자는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문제’였고, 특히 가톨릭과 이슬람에서는 여전히 완강하게 유지되는 ‘문제’다. 이들은 누구에게 받아들여지든 거부되든, 공동체의 ‘문제’로 취급되어 소외되고 배제되는,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있다. 성소수자는 말 그대로 어디에서나 소수인 것이 분명하다. 분명하지 않은 것은, 이 특정한 사회적-성적 특성이 왜 그리 가혹한 모멸과 혐오를 받아야 하며, 성소수자들이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고 있는 인간 존엄과 평등과 권리가 왜 이 특성 하나로 부정되고 위협받아야 하는가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인간은 저마다의 크고 작은 차이에도 서로가 서로를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 평등의 물러설 수 없는 원칙이다. 이 원칙을 ‘동등한 인간 가치’의 원칙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느님의 눈앞에서는 누구나 같은 존재라고, 자주 말하지 않는가? 이 가치와 대조되는 것이 장점이나 능력이다. 사람마다 성취, 능력, 기여도, 역할은 모두 다르고 정도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의 가치는 이 모든 것을 빼고 남아 있는 아주 기본적인 심층의 윤리적 특질이다. 이 특질을 배제하면, 우리가 인간을 존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사라진다. 우리가 이런저런 능력과 장점이 있어서 존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 존엄하다.

법철학자 제레미 월드론은 인간의 존엄을 ‘지위’의 문제로 보자는 제안을 했다. 특정한 사람이나 부류가 지니고 있을 지위가 아니라, 누구나 최고의 존중과 배려를 받아야 하는 ‘인간으로서의 지위’다. ‘인간 존엄’이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이는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볼 수 있는 존중이나 모욕 같은 태도와 행위의 가치와 한계를 더욱 분명하게 해준다. 내가 존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최소한의 자기조절 능력을 지니고 다른 사람들 앞에 떳떳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상태와 같다. 스스로 비참하게 느끼거나 사람들 앞에서 비열하게 굴거나,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과도하게 굴종하는 상태가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상당 부분,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우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존중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은 망상이다. 누구를 모욕하는 사람은 이를 이용하여, 자신들이 거부하고 배제하고 종속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자기존중에 상처를 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뿐 아니라 그 누구도 이 파괴적인 충격에서 자유롭지 않다. 우리 안에 깊이 자리한 자기 존중감은 단지 어떤 가치의 주관적인 상태가 아니다. 매우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어떤 여성이 자신은 차별받은 경험이 없다고 해도, 사회-정치-문화의 현실에서 체계적인 차별과 억압이 존재하는 한, 그 여성은 기본적인 자기존중에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모욕과 멸시가 주는 폭력에서 전적으로 안전한 자신의 내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없다.

의도적인 모욕이 윤리적으로 저열한 것은 인간존엄의 심층인 자기존중에 큰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인간존엄’이 실제로 무엇인지 모르겠으면, 우리가 평소에 누구를 차별하고 모욕하는지를 보면 된다.

루카 복음서에는 어느 바라사이의 집에서 ‘죄 많은 여인’ 하나가 울며 예수의 발을 향유로 씻겨 주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면서 “이 여인이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많은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는 예수의 말을 전한다. 이 말을 나는 용서와 수용이 먼저 있었고, 그에 따라 여인의 사랑의 행위가 드러난 것으로 읽는다. 이 여인은 자신을 받아주는 넓고 깊은 환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적대와 모멸의 경계를 깨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환대를 한다.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이제 평안하게 가라”고 축복한다. 모멸 받는 소수자들은 교회 공동체에 축복이다. 그들이 이른바 그리스도인들보다 윤리적으로 우월하다.

 

박상훈 신부(알렉산더)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박상훈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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