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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첫째 아들이 될 것인가?

기사승인 2020.09.24  14:3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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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숙 수녀] 9월 27일(연중 제26주일) 에제 18,25-28; 필리 2,1-11; 마태 21,28-32

우리 사회 내부에는 수많은 종교지도자가 자신의 신도들에 둘러싸여 목회 활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구를 어떻게 존경할지는 주관적 판단이나 이번 광화문집회 이후 코로나 대유행을 일으킨 모 종교계의 민낯은 두고두고 회자거리다. 종교인들에게 함부로 소명을 부여하고, 선택받은 자라며 추켜세우는 것이 얼마나 황망하고 위험천만한 일이 될 수 있는지 온 사회가 실감한 자리였다. 그렇게 사랑제일교회의 폭주는 나라 전체를 다시 ‘스톱’시켰다. 모두들 간신히 팬데믹 종식만을 기다리며 아슬아슬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우리가 빼앗긴 것은 비단 일상으로 돌아갈 기회만이 아니다. 이제 겨우 꺾인 무릎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서려는 사람들, 남은 일자리, 숨 쉴 자유, 미래를 앗아가 버린 것이다. 민주주의는 민생의 위장 속을 파고드는 독버섯도 ‘내 권리’만 주장하면 속수무책인 것인가? 지금도 제2, 제3의 전광훈 같은 자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아무튼 2020년은 개신교계에 싸잡힌 한국 종교계가 그나마 남아 있던 사회적 운신의 폭이 형편없이 좁아진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종교가 한 사회의 최고 가치인 ‘공평’에 대해 공적인 기여를 할 수 없다면 스스로 ‘자기존폐’에 대해 심각히 고려할 일이다. 누가 그들이 선전하는 ‘정의와 공정의 신’을 믿고 공감할 수 있겠는가? 그렇잖아도 믿을 수 없는 신은 팬데믹으로 인해 더 선명해질 참이다. 이제 사람들이 믿고 싶은 신의 1순위는 팬데믹에서 구해 줄 신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불투명한 미래가 지속될수록 신의 보편적 가치와 희망은 점점 더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안녕으로 축소되고 만다. 그러니 교회가 걱정할 일은 자신의 신도들 숫자나 재정 상태가 아니라 꺼져 가는 신의 공정과 희망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기후위기의 지표들을 다시, 또다시 재검하면서 이 불길한 시대를 밝혀 줄 ‘노아의 플랜’을 고민할 일이다. 에제키엘의 신처럼 나서는 일이다: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은 아니냐?”(에제 18,25)

신이 ‘공평’을 들고 나선 것은 ‘공평’의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그는 무기력한 현실로 미래를 잃은 사람들에게, 힘이 풀린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자 나선 것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무기력은 새로운 질서, 혁명으로 나아가는 데에 경계해야 할 1호 대상이다. 무기력은 힘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장 파괴적인 힘의 또 다른 말이다. ‘악이 승리를 거두기 위한 최선의 조건은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무기력한 양심은 제 몸에 더러운 것을 묻히지 않고 하늘의 뜻을 이뤄 보겠다는 관념가들의 망상이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더럽혀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며 진즉부터 교회의 등을 떠다 밀었다. 걱정만 하는 기도는 학살의 현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 대멸종의 시기를 보지 않으려고 창에 커튼을 치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최대한 안전한 무균실에 앉아서 팬데믹을 치워 달라고 양팔 기도를 하면 하느님이 들어주시리라고 믿는가? 설마.

(이미지 출처 = Pxhere)

우리가 고민할 것은 ‘어떻게 첫째 아들이 될 것인가’(마태 21,28-32)에 있다. 예수는 이 첫째 아들을 둘째 아들로 묘사한 독단적 교조주의에 빠진 수석사제, 율법학자, 바리사이와 따로 나누어서 배치한다. 결국 하늘나라의 혁명적 변화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예기치 못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하늘나라의 혁명은 가장 바닥에 있던 사람들부터 깨어나, 그들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면서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교조주의를 온존시키는 지배구조는 이들이 깨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들이 깨어나 자신들이 정한 질서를 훼손하고, 자신들이 착좌한 자리의 성역을 해체하고, 몰려오는 것이 두렵다. 애초에 이들의 관심사는 포도밭이 아니다. 자신들의 세계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나머지들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공평한 질서다. 그렇게 자리를 배치하면서 사람들의 운명을 배치하고,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를 박탈한다. 그들이 서로 웃고 행복할 기회, 함께 책임지면서 새로운 교회와 세계를 만들어 갈 권리를 빼앗는다. 그들은 명령하는 위치에서 내려올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것이 둘째 아들의 태도다.

그런데 예수가 이들의 허를 찔렀다. 그는 자신을 ‘나머지’ 부류의 사람으로 내세웠다: 그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을 비워 종의 모습을 취했으며,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필립 2,6-7) 그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자신을 낮추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8)하는 사람이 되었다. 인용된 필립비서는 예수를 기억하는 한 가장 오랜 추종자들의 기억에서 왔다. 그들이 기억하는 예수, 그들이 예수로부터 받은 강렬함이 고스란히 이 한 편의 시에 녹아 있다. 그는 하느님의 공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몸소 보여 준 첫 번째 사람이다. 이 얼마나 세상 이치와 대조적인가? 그는 사제와 원로들이 선을 긋고 내다 버린 그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는 신적인 지위를 버리고 끝 간데까지 내려갔다. 그렇게 해서 그 끝자락에서 대못에 찔린 사람들과 함께 되돌아왔다.(마태 21,31) 공평은 이렇게 이루어진 신적 계시의 중심이다. 이날, 타락한 모든 권력이 사형판결을 받았다. 예수와 함께 돌아온 사람들,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의 유죄 판결문이 되었다: ”정의를 버리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는 죽을 것이며, 악인이라도 죄악에서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것이다.“(에제 18,26-28)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강신숙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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