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예외적인 애도가 일상이 되는 현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많은 ‘상실’을 가져다 주었다. 노동이 이전보다 불안정해지면서 일터에서 쫓겨나거나 강제로 쉬어야 하는 노동자의 얼굴에선 일터를 빼앗긴 자의 상실이 보인다. 학교에 못가는 것은 너무 좋지만 친구들과 놀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어린이들의 얼굴에선 놀이터를 빼앗긴 자의 상실이 보인다. 폐업의 위기에 놓인 자영업자들의 얼굴에선 삶터를 빼앗긴 자의 상실이 보인다.

그중에서도 우리 사회가 경험한 가장 큰 상실은 코로나19로 인해 406명(2020.09.28 기준)이 사망한 점이다. 지난 7개월 동안 406개의 세상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분들의 죽음을 숫자로만 기억할 뿐 누구의 가족, 동료이자 친구였던 사람들의 삶은 조명하지 못한 채 ‘갑작스런 죽음’을 그저 뉴스로 볼 뿐이다. ‘코로나19와 애도’라고 검색하면 코로나19로 의료 활동을 하던 의사의 죽음에 대한 애도만이 가시화되고 코로나19 사망자에 대한 사회적인 애도는 부재하다.

예외적인 애도가 낳은 비극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한 죽음은 ‘예외적인 애도’를 낳았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사연은 절절하다. 가족이나 지인이 코로나19로 사망하는 경우 가족들은 가까이서 고인의 임종도 지킬 수 없었고 마지막 작별인사도 할 수 없었다. 사람이 죽어가는 절차와 죽음 이후의 절차는 엄격히 ‘통제’되었다. 사망 후 유가족들은 장례도 치르지 못했고, 시신을 처리할 권한을 갖지 못했다. 시신은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과 시행령’에 따라 가족동의 후 무조건 24시간 안에 화장시켜야 했다. 국가재난대비 지정 장례식장이 있지만 사실상 시신을 안치 할 뿐 유가족들은 거의 빈소를 차리지 못한다. 가족이 원하면 보호 장비를 장착하고 화장과정을 참관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 지인 중 확진자가 있다면 확진자는 화장절차에 참여할 수 없다. 이렇듯 유가족과 지인들에게는 충분히 슬퍼하고 슬픔에 기대어 힘든 시간을 견딜 권리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이 모든 예외적인 상황을 허용하는 것은 감염병을 예방하고 확산을 막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한다. 상식적이지 못한 애도과정을 겪은 유가족과 지인들은 고인을 잘 보내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무력감, 우울감 등 심리적 고통을 겪는다. 이때 유가족들의 마음은 가장 힘든 상황에 놓인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비통함은 일반적인 슬픈 감정과 다르다. 사별에 따른 상실은 ‘심리적 외상’으로 마취를 하지 않고 심장을 헤집는 것과 같은 느낌에 가깝다. 그래서 유가족들과 지인들이 비통함과 슬픔에 기대어 고통스런 감정을 충분히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그들의 비통함과 슬픔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보이지 않는 죽음

그렇다면 왜 누군가의 애도할 권리는 박탈되거나 방해받는 것일까? 방역 당국의 입장에선 코로나19 확진자들이 사망에 이를 때 이를 방역과 의료 활동의 실패로 규정할 수 있다. 확진자가 늘고 치사율이 올라간다는 것은 국가가 코로나19 방역과 의료 활동에 허점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게다가 감염병으로 인한 죽음에 더해지는 사회적 낙인과 편견은 유가족들과 지인들에게 고인을 충분히 애도할 수 없도록 한다. 그래서 유가족과 지인들은 사별로 인한 고통에 더해 주변으로부터 이해 받거나 공감 받지 못하는 이중의 고통에 놓인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노력에 한국 사회가 총력을 기울이다 보니 유가족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선 공감하지도 직면하지도 못하고 있다. 또한 우리 각자는 코로나19와 같은 급격한 재난으로 야기되는 삶의 변화에 적응하느라 애도할 여력이 없는 것 같다. 분명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죽음 가운데 우리는 ‘애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애도가 지연되거나 유예되었을 때 우리 사회는 어쩌면 큰 사회적 비용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애도의 권리를 위하여

애도상담가이자 작가인 인현진 씨는 “애도란 사람들이 고인에 대한 비탄과 슬픔, 그리움, 충격과 고통을 겪으면서 사별을 수용하고 삶으로 다시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 충분히 그 과정을 슬퍼하고 견디어야 그 시간과 공간을 넘어설 수 있다. 만약 슬픔과 고통을 피하고 억누르면 그 감정들이 마음이나 몸의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유가족들에게 “그만 슬픔을 털고 일어나라”거나 “이제 됐으니 일상으로 돌아와”와 같은 태도는 피하는 것이 좋다. 상실에 슬퍼하고 고통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기에 당연히 겪는 경험이다. 이 경험을 온전히 겪을 때 유가족과 지인들은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 과정이 애도라고 할 수 있다. 슬픔을 박탈하지 않고 함께 슬퍼하는 것이 이웃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애도다.  

'서로를 기억하고 연결하는 온라인 행동' 안내. (이미지 출처 = 코로나19 인권대응네트워크 페이스북)

그래서 상실을 개인의 것으로 두지 않고 우리 공동체가 함께 겪어 나갈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싶다. 한국 사회가 코로나19로 가족과 동료, 친구를 잃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지지적인 환경을 만들고 고인 없는 새로운 삶으로 적응해 나가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코로나19로 죽어간 사람들을 애도하자는 취지로 지난 4월 코로나19 인권대응네트워크는 '사회적 애도를 만드는 온라인 행동, 함께해요!'를 운영하고 있다. 이 캠페인은 코로나19 사망자와 확진자에 대한 위로와 연대의 뜻 알리기 위한 것이다. 

이 사례는 사회적인 애도를 만들어낸 활동으로 주목할 만하고 지금도 필요하다. 인현진 애도상담가는 “유가족은 주변 사람들이 연대하고 지지를 보내주면 애도 과정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덜어낼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코로나19라는 재난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다가오는 것 같지만 실상 사람들은 불평등하게 지금 상황을 견디고 있다. ‘애도의 권리’ 역시 마찬가지다. 왜 애도가 중요하냐를 묻는다면 잘 애도해야 잘 살아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이 죽어가는 과정에서도 죽음 이후에도 연결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은 너무 사치스러울까. 전염병 예방과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고통을 감내하는 일상을 살면서도 코로나19로 죽어간 사람을 애도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한 보루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죽음을 기억하지 못한 사회는 삶조차 돌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은아
25년 동안 천주교인권위원회,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상임활동가로 일했다.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인권, 애도, 노동에 관해 공부하며 글을 쓰고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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