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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피조물이 축제를 이루는 그날까지

기사승인 2020.10.08  15: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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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숙 수녀] 10월 11일(연중 제28주일) 이사 25,6-10ㄱ; 필리 4,12-14.19-20; 마태 22,1-14

이제는 완연한 10월, 상큼하고 쌀쌀한 공기가 감사한 절기가 돌아왔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이 가을이 고맙고, 또 고마워서 뭉클하기조차 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온 산하가 물감을 풀어놓은 듯 붉고 노란 장관을 펼칠 것이다. 이렇게 강퍅한 시기를 보내면서도 가을은 여전히 우리 곁으로 다가와 한 번쯤 시인이 될 수 있고, 좋아하는 시구 한 소절쯤 읊조려도 좋다고 토닥인다. 아니 그런 여유를 내 보라 응원한다. 쓸쓸한 도시의 가을도, 기찻길 따라 펼쳐진 황금 들판도 모두 한 폭의 수채화가 되고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린 그렇게 아직은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될 수 있는 계절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우리가 누리는 이 '현재'가 우리 미래의 세대들도 누릴 수 있기나 한 걸까? 이런 생각은 급 우울감을 동반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어서다.

어느 때보다 이번 여름은 역대급으로 지구촌 이상 기후현상을 쏟아낸 한 해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장마 일수는 고사하고 북반구에서 남반구에 이르기까지 이상 징후를 보이지 않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을 정도다. 북반구는 141년 만에 맞는 찜통 여름을 기록했고, 러시아에서는 굶주림에 지친 깡마른 북극곰이 마을을 배회하는가 하면, 알프스의 푸른 빙하가 분홍색을 띠면서 마지막 수명을 재촉하고 있다. 20도로 오른 남극지대엔 진흙탕을 뒤집어쓴 어린 펭귄들이 초췌하게 서 있고, 우리나라 면적의 63퍼센트를 태운 호주 남동부 산불은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5억이 넘는 동물들을 태운 최악의 산불로 기록되었다. 그 화마를 피해 달아나다 철조망을 움켜쥔 채 불에 타 죽은 어린 캥거루 사진은 온 세계인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그러나 이 사진 한 컷은 우리에게 또 다른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마치 불길한 인류의 미래를, 철조망에 가로막혀 타들어 가는 인류 미래의 데자뷰를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어떨까? 사실 '기후위기'에 관한 한 대한민국 성적표는 최악이다. 언제부턴가 환경단체들은 대놓고 대한민국을 '기후깡패국가'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후변화대응지수(CCPI)에서 한국은 2020년 61개국 중 58위, 온실가스 배출 세계 7위, OECD 국가 중 이산화탄소 배출량 증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얼마 전 국회에서 '기후위기 비상대응촉구 결의안'이 가결되었다는 소식이다. 결의안에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1.5도 특별보고서'대로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혁명 이전 대비 1.5도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한 방안이 담겨 있다. 그러려면 205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완전 제로를 위한 '2030 탈석탄 로드맵'이 나와야 하고, 최소한 온실가스 배출 50퍼센트는 감소시켜야 한다. 2050년 순배출 제로를 목표로 하는 구체적 정책이 과연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을지 그것부터 걱정이다.   

(이미지 출처 = Pxhere)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기후위기"란 말이 대중적으로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며, 기후위기에 대한 각성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매우 고무적이다. "희망"이라는 것은 사람들 개개인이 절망적인 상태를 인식하고, 그 사태의 맥락을 깨달아야만 출구를 향한 '행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대응은 전 국민적으로, 국가 간의 협의체로 '너, 나' 할 것 없이 일어나야 하는 긴급 비상운동이다. 이런 일은 가히 "혁명"적이라 말할 만큼 전격적이어야 하고, 또 혁명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새로운 전환, 새로운 희망의 날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앞으로 전 세계인들의 생존전략은 "생태전략"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탄소배출 제로'의 날이 올 때까지 세계인 모두 서로의 손을 맞잡아야 한다. 이렇게 맞잡은 손들이 마치 오늘 초대받은 하객들의 손처럼 여겨지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거리의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야 할 때다: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마태 22,9-10) 와서 축제의 장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날 초대받은 거리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함께 모여 축하하는 한마당이 될 터이다.

이렇게 해서 '혼인 잔치에 관한 비유'를 듣고 있는 오늘 우리 교회는 초대자이면서 동시에 초대받는 이가 되었다. 교회는 세계가 다시 처음 창조로 돌아가는 필살의 장, 필살의 노력을 기울이는 터전이 된 것이다. 이미 예수로부터 시작된 혼인잔치의 초대가 축제가 되려면,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다른 변명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초대를 호소하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으며, 어떤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는"(5-6)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믿기 어렵겠지만 상황은 이렇게 흘러갔다. 혼인 잔치는 결정적으로 공동체의 미래다. 사랑과 생명의 혼인 잔치가 파괴된 거리, 축제가 사라진 마을, 상상과 에너지, 창조의 기쁨이 사라진 곳에서 생존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그만큼 예수의 혼인 잔치 비유는 축제 최고도의 기쁨만큼이나 역설적이 되었다. 결국 첫 번째 혼인잔치는 무관심과 냉담, 배신과 폭력으로 얼룩졌지만 이내 새로운 초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날, 예기치 못한 초대의 반전을 보게 될 것이다. 처음 배제되었던 사람들이 잔치집으로 몰려와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이사 25,8-10)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강신숙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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