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선교’의 성지 네팔?

지난달 ‘세계사회포럼’과 그와 연계한 ‘세계해방신학포럼’이 힌두교와 불교의 성지이자 히말라야 산맥의 나라 네팔에서 열렸다. 카트만두 공항에 내리자마자 도착비자 받기에 분주한 한 무리의 한국 개신교 중년 여성들과 조우했다. 이른바 ‘단기선교’를 온 모양이었다. 부지불식간에 아시아 청년 프로그램을 위해 방문해 온 거의 모든 아시아 국가에서, 심지어 오지의 토착원주민 마을들에서도 목격하던 교회당 십자가가 떠올려졌다. 반가움보다는 낭패감이 앞섰다. 감정적 ‘오버’일 수 있겠으나 오랫동안 종교문화 다원주의 및 토착민 종교 전통과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가르쳐 온 푼수이기에 일종의 ‘위기감’(?)이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아시아 나라를 향하고 있는 한국 개신교의 단기선교가 연인원 10만을 넘어서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우월의식의 발로일 때가 심심찮다니 근거 없는 오지랖은 아니었지 싶다.1) 어쨌든 네팔에서는 이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오는 첫날부터 그 기대는 보기 좋게 어긋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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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트리 라헵과 바르센 아가베키안이 해방신학포럼 참가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세계해방신학포럼)

해방신학포럼과 가자의 인종학살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온 신학자들은 구체적인 경험은 다르지만 여전히 신식민적 상황에 있고 따라서 ‘해방’의 가치가 여전하다는 데 너나없이 공감했다. 토론은 뜨거웠고 진지했으며, 짧은 시간에 이심전심의 진한 유대감으로 분위기가 달궈지기도 했다. 하지만 수천 명의 시위대가 카트만두 도로로 쏟아져 나와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세계사회포럼의 개막을 알리는 가두 행진에 참가한 감격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20여 년 전 월스트리트도 무너뜨릴 것만 같던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구호가 ‘오래된 미래’처럼 새삼 반가웠다. 축제를 방불케하는 가두시위 가운데 역시 팔레스타인과 가자(Gaza)에서의 학살을 규탄하는 피켓과 현수막이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어느 중동 언론에서인가 본, 어린 자식 일곱이 이스라엘 폭격으로 모두 다 목숨을 잃었다며, 그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 생김새, 또 아이들이 가졌던 꿈을 하나하나 헤아리다가 제대로 목놓아 통곡도 하지 못하는 그 아버지의 갈라지던 목소리.... 도대체 이 천인공노 할 죄악과 천추의 한을 어찌하려고 그토록 모진 악업을 쌓고 있는가. 참담함이 가슴 벅찬 연대감을 압도해 왔다. 인간사 멀리 보면 희극이라는데, 아무리 멀리 보려 해도 가자는 처절한 비극으로 밖에 안 보이니, 종당에도 인간사는 비극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세계사회포럼의 해방신학 세션에서 발표한 미트리 라헵과 바르센 아가베키안은 이스라엘의 ‘인종 분리 및 차별 정책’(Apartheid)과 대량학살이 이미 75년 전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불법 점거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지난 4개월 동안 민간인 포함 3만여 명이 살해됐고 병원과 대학을 포함해 가자 지구내의 인프라가 거의 파괴됐으며 팔레스타인 1100여 명이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감금되어 있다.2)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사상자와 부상자는 더 늘었고 가자 인구 200만여 명 중 70퍼센트가 집이 파괴되거나 점령당해 갈 곳이 없는 상태에 있다. 더욱이 미국을 필두로 서방의 묵인과 지원 아래 이스라엘이 벌이고 있는 대량살상이 단지 하마스의 축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민족 전체에 대한 인종학살(genocide)을 감행하고 있음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마지막 정치생명을 이 전쟁을 지속하는 데 걸고 있다. 또 시도 때도 없이 교전 지역으로 들어가는 인도적 비상식량 트럭을 저지하여 이 식량에 의존하고 있는 가자 난민들을 말 그대로 굶겨 죽이는 ‘아사 작전’을 펴고 있다. 더욱이 최근 미국에 휘둘리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정치 경험이 거의 없고 팔레스타인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새 총리를 임명함으로써3) 팔레스타인을 분열시켜 지리멸렬하게 만들고자 하는 책략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극보수 네타냐후 정권에 대한 반대 시위가 점점 더 격화하고 있고 가자 학살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 또 하마스와의 전쟁이 쉽게 끝나지도 않을 뿐더러 자칫 중동 전역으로 확전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등으로 미국 공식 정보기관이 물밑에서 네타냐후를 중립적 인사로 교체할 가능성을 저울질한다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4)

2024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한 해방신학포럼 참가자들. 개막 가두행진 모습. (사진 제공 = 세계해방신학포럼)<br>
2024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한 해방신학포럼 참가자들. 개막 가두행진 모습. (사진 제공 = 세계해방신학포럼)

신식민주의와 ‘그리스도교 시오니즘’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다시 카트만두 공항. 이번에는 스무 명쯤 될 법한 한 무리의 청년들을 만났다. 그냥 넘어가도 될 것을 굳이 단기선교 여부를 물었고 ‘그렇다’는 대답을 받아들고, 안도감인지 낙담인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이 되어 오는 내내 오락가락. 단기선교는 분명 개신교 일부에서 벌이고 있는 ‘공격적 선교’와 동일시하기는 어려워 보이고 또 그렇게 몰고 갈 의도도 없다. 더욱이 거의 명맥 유지도 어려워서 이제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리스도교 일치운동’에 찬물 끼얹을 이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그 옛날 식민주의 첨병처럼 “예수에게 승리를”을 외치며 토착민들에게 ‘돈과 하나님 말씀’을 앞세워 “경제적으로 또 영적으로도 빈곤한 부족민들을 개종시키는”5) 선교활동을 목표로 하고 있는 데서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는 지난 20년 넘게 아시아 이곳저곳을 다니며 목격한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한 판단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네팔에서는 개종 행위가 불법임에도 개종과 단기선교의 ‘핫한’ 장소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으니, 그 이유를 개신교계의 ‘종교간 상호 대화나 배움’의 태도에서 찾기는 어려운 듯하다. 앞의 <BBC> 기사에 등장하는 한국인 목사는 불법임을 알면서도 거의 힌두교와 토착종교를 믿는 원주민을 개종시켜 20여 년 만에 70여 개 교회를 지었다면서, “모든 골짜기마다 교회가 지어지고 있다”며 이는 ‘기적’이라고 자랑스러워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네팔 전 부총리를 지낸 카말은 “네팔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조직적 공격”이라고 비난하면서, 선교사들이 배후에서 가난하고 무지한 이들을 착취하고 개신교로 개종하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주장한다. 곧 “이는 종교적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이름으로 착취하는 사례”6)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런 ‘신식민주의적 선교’가 잘못된 선민사상과 그에 따른 팔레스타인의 살육을 정당화하는 ‘시오니즘의 그리스도교 버전’이 아닌지 역사적으로, 종교적으로 반성해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트리가 지적하듯이, ‘가자는 가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말이 네팔과 한국에서는 여지없는 현실이기에 이 문제를 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를 묻고 있는 그의 핏발선 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 한현구, ''한국 단기선교팀 오지 마세요’ 냉정한 평가 듣지 않으려면', <아이굿뉴스>, 2023.04.17.
2) 황경훈, '팔레스타인의 자유 없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24.02.20.
3) 김동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새 총리에 무스타파 PIF 회장 임명', <연합뉴스>, 2024.03.15.
4) Al Jazeera, 'How does US intelligence disagree with Israel on Gaza?', <Inside Story>, 2024.03.14.
5) 'Christian missionaries target the birthplace of Buddha in Nepal', <BBC>, 2023.01.14.
6) 위의 기사.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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