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 증후군의 기록(Life Overtakes Me)', 존 햅터스, 크리스틴 사무엘슨, 2019

다큐멘터리 '체념 증후군의 기록' 포스터.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체념 증후군의 기록' 포스터.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여전히 죄 없이 고통받는 세상의 아이들
교회에서 12월 28일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이다. 폭군 헤로데는 예수가 태어날 무렵, 왕권에 위협을 느껴 베들레헴과 그 일대 두 살 이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교회는 아기 예수를 대신해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오래전부터 순교로 여겼는데, 중세 이후에 더욱더 성대한 축일로 발전했다. 죄 없는 아이들의 무고한 죽음은 인류 역사 내내 이어지고 있다. 지금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엄청나게 많은 아이가 이스라엘군의 폭격에 희생당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나 기아 등으로 많은 아이가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어린아이의 희생과 아울러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은 인류가 저지른 여러 죄로 인해 사라져가고 고통받는 어린아이들을 돌아보는 날로 승화하고 있다.

넷플릭스가 제작한 40분가량의 다큐멘터리 '체념 증후군의 기록(Life Overtakes Me)’은 난민 아이들이 겪는 고통에 관한 충격적 보고서다. 2003-05년부터 스웨덴에서는 아이들이 갑자기 멍해지고 무기력해지다가 어느 순간 깊게 잠들어버리는 ‘체념 증후군(Resignation syndrome)’이란 신종 질환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주로 어린아이와 청소년이 걸리는 ‘체념 증후군’은 그 자체로 죽음에 이르지 않지만, 스스로 생을 유지할 수 없기에 가족의 돌봄이 절대적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차츰 비슷한 사례가 등장하기 시작해 온전히 스웨덴만의 사례는 아니지만 현재까지는 스웨덴에서 독보적으로 많은 질환자가 나오고 있다. 특수한 지역이나 문화권에서만 나타나는 이상 행동 등을 일컫는 ‘컬처바운드 신드롬(culture-bound syndrome)’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 질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난민 아동에게 집중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서 심리적 요인에 따른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 질병이 난민을 잘 받아들이는 스웨덴에서 유독 많이 발생하는 것도 미스테리한 일인데, 어쩌면 언제 다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정한 난민 지위 속에서, 아이들의 유일한 의지처인 부모의 불안은 결국 아이들에게 옮겨지고, 아이들은 그 불안을 떨쳐내지 못하고 자기를 지키기 위해 잠들어버린 것은 아닌지. 정말 기이한 질병이요, 기이한 현상이기까지 한 체념 증후군의 정확한 원인 파악은 아직도 되지 않으며 여러 추측만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세 가족을 추적하는데, 특이한 형태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체념 증후군을 통해 난민 문제를 아이들의 시점에서 돌아보게 해준다.

세 가족 이야기
이야기는 체념 증후군에 걸린 다리아, 카렌, 레일라의 가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세 가족 모두 자기 나라의 탄압을 피해 온갖 고난 끝에 스웨덴에 도착한다. 아이들의 어머니 중에는 성폭행을 당한 이도 있는데, 전쟁을 비롯한 온갖 고난 속에서 가장 극심한 고통을 받는 이는 여성과 아이들이다. ‘식물인간’이 아니지만 잠든 상태로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간 잠든 상태로 보낸다고 한다. 스웨덴 정부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불안과 절망 상태에서, 체념 증후군에 걸린 아이들은 이중의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들이 곧 깨어나기를 바라며, 밝게 뛰어놀고 웃고 떠들 때처럼 아이들을 대한다. 아이들에게 부모가 유일한 의지처였듯이, 부모에게도 아이들은 살아갈 희망의 끈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고 일상을 함께한다.

스웨덴에서 체념 증후군이 처음 보고되었을 때, 여론의 주목을 크게 받고 격렬한 논란이 있었다. 아이들이 동정심을 사기 위해 연기를 한다거나, 부모가 벌인 자작극이라는 등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했다. 아무리 조사해도 체념 증후군 증상이 조작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혐오 세력의 가짜뉴스는 세계 곳곳에서 판을 치기 마련이다. 어쩌면 스웨덴의 이런 사회적 분위기 영향으로 체념 증후군이 생겨난 것은 아닌지. 스웨덴은 확실히 난민을 잘 받아들이는 나라였지만, 이들에 대한 통합 정책이 실패하고 점점 난민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특히 반이민주의, 반이슬람주의, 이민자 추방을 주장하는 스웨덴 민주당이 2022년 총선에서 20.5퍼센트를 득표하며 급격하게 성장한 사건은 스웨덴에서 반이민 정서가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다큐멘터리 후반부에서 다리아의 가족은 다행히 거주 승인을 받는다. 가족은 아직 잠들어 있는 다리아에게 승인 허가서를 읽어준다. 이렇게 가족의 안정이 찾아온 뒤 다리아는 깨어나 예전처럼 밝게 뛰어논다. 카렌은 이제 걸쭉한 음식과 액체는 섭취할 정도로 신체 활동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레일라 가족은 항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언제 추방당할지 모르는 더욱더 불안한 상태에 놓인다. 레일라에 이어 큰언니마저 체념 증후군에 빠져든다.

​​​​​​​다리아는 자신이 오랫동안 잠들었는지도 모른 채 다시 여느 아이들처럼 건강하게 뛰어놀고 있다. (이미지 출처 = “당신의 아이가 1년간 잠에서 깨지 못하면 어떡하실 건가요”, 유튜브 엉준 채널  영상 갈무리)
다리아는 자신이 오랫동안 잠들었는지도 모른 채 다시 여느 아이들처럼 건강하게 뛰어놀고 있다. (이미지 출처 = “당신의 아이가 1년간 잠에서 깨지 못하면 어떡하실 건가요”, 유튜브 엉준 채널 영상 갈무리)

우리 곁의 착한 사마리아인 노옥희 교육감과 우리 안의 난민 문제
이 충격적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우리의 난민 문제를 떠올려 보게 된다. 스웨덴에서 극우 정당이 약진하고 반이민 정서가 증가했다고 비판만 할 일이 아니다. 적어도 스웨덴이나 독일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는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런 와중에서 겪고 있는 여러 시행착오이니 말이다. 한국은 아예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봐야 한다. 2018년 예멘 난민이 제주에 도착했을 때 근거 없는 아우성도 그런데, 이때 유엔난민기구 친선 대사로 활동하는 배우 정우성 씨가 난민을 돕자고 해서 엄청나게 비난받았던 사건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막연한 두려움으로 난민에게 철벽을 치는지 잘 보여준다.

난민 문제와 관련해 우리에겐 또 하나의 시험대가 있었다. 2021년 8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자, 한국 대사관이나 기업 등에서 근무했던 아프가니스탄인 390여 명을 한국으로 데려와 이들에게 ‘특별기여자’라는 자격을 부여했다. ‘특별한 기여가 있는 난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었으나, 같은 권리를 부여했음에도 난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새롭게 ‘특별기여자’라는 체류자격을 만들었다는 견해가 있다.(“‘390명의 특별기여자’ 그 기이한 용어의 비밀과 파장”, 이일, <오마이뉴스> 2021.08.31.)

우리는 먼 나라에서 온 새로운 이웃을 받아들이는 귀감으로 고 노옥희 울산 교육감을 기억해야 한다. 현대중공업의 협력업체 취업 주선으로 특별기여자 중 157명이 울산 동구에 정착했는데, 이들의 자녀들이 다닐 학교 배정을 두고 논란이 빚어졌다. 일부 학부모는 외국인 학교를 먼저 고려하라고 요구했지만, 일부 시민단체는 차별 없이 따뜻하게 반기자고 했다. 이때 노옥희 교육감은 먼저 ‘함께 알자’고 제안하며, 특별기여자 자녀가 등교하기 전에 울산교육청 전 직원이 참여하는 ‘다모임 회의’에서 이슬람 전문가 이희수 교수를 초청해 함께 강의를 들었다. 노 교육감은 특강 직후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와의 만남은 또 다른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사 기도한다”고 소회를 남기며, 착실하게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을 받을 준비를 했다. 2022년 3월 21일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자녀들의 첫 등굣길, 노옥희 교육감은 등교하는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학교로 향했다.

(이미지 출처 = 아프간 특별기여자 자녀 첫 등교 “만나서 반가워요”,&nbsp;KBS울산 유튜브 채널 2022년 3월 21일 방송 갈무리)
(이미지 출처 = 아프간 특별기여자 자녀 첫 등교 “만나서 반가워요”, KBS울산 유튜브 채널 2022년 3월 21일 방송 갈무리)
정찬수 울산 교육감이 아이들의 한국어 수업에 참관하고 있다. 아프간 특별기여자 자녀 26명&nbsp;어린이들 중 절반은 다문화정책 연구학교로 지정된 서부초등학교 한국어 학급에서 오전에 수업받고 오후에는 원래 배정된 반으로 돌아가&nbsp;같은 반 아이들과 어울리며 서로 간의 벽을 좁혀가고 있다.(이미지 출처 = "울산 안착 1년 4개월... 아프간 아이들의 한국어 교실", YTN 유튜브 채널 2023년 7월 2일 방송 갈무리)
정찬수 울산 교육감이 아이들의 한국어 수업에 참관하고 있다. 아프간 특별기여자 자녀 26명 어린이들 중 절반은 다문화정책 연구학교로 지정된 서부초등학교 한국어 학급에서 오전에 수업받고 오후에는 원래 배정된 반으로 돌아가 같은 반 아이들과 어울리며 서로 간의 벽을 좁혀가고 있다.(이미지 출처 = "울산 안착 1년 4개월... 아프간 아이들의 한국어 교실", YTN 유튜브 채널 2023년 7월 2일 방송 갈무리)

난민 문제는 세계 시민과 함께해야 하는 또 하나의 책임
노옥희 교육감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많은 이를 슬프게 했지만, 그의 노력이 꽃을 피워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이 한국에 잘 적응하고 있다. 게다가 현 정찬수 울산 교육감은 노 교육감의 남편으로 그 일을 잘 이어가고 있다.(정찬수 교육감의 당선은 노 교육감을 잃은 슬픔 뒤에 찾아온 기쁜 일이기도 했다.) 울산에서 특별기여자 자녀의 적응 과정은 한국 사회에서 난민이 정착하는 긍정적 사례지만, 그 밖에 난민 지위를 요구하는 이들과 그들의 아이들이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모르긴 해도 불안에 떨며 힘겨워하는 난민 아이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난민 문제와 관련해 한국은 전 세계로부터 급속하게 선진국으로 발전했지만, 국제사회의 역할은 가급적 피하고 무임승차를 해왔다고 비판받는다. 물론 난민 문제와 관련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이해하지만, 세계와 교류 속에서 풍요를 누리는 우리가 세계의 연결 고리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등한시하는 것은 분명 무책임한 일이다. 사실 난민을 난민이라 부르지 못한 ‘특별기여자’ 자격도 그렇고, 사태를 정면으로 부딪치려는 의지는 미약해 보인다.

2012년 튀르키예 해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세 살짜리 시리아 난민 아일란을 추모하는 그림. (이미지 출처 = “‘굿나잇 베이비’ 파도로 된 이불 덮은 난민 아기”, YTN 유튜브 채널 2015년 9월 4일 방송 갈무리)
2012년 튀르키예 해변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세 살짜리 시리아 난민 아일란을 추모하는 그림. (이미지 출처 = “‘굿나잇 베이비’ 파도로 된 이불 덮은 난민 아기”, YTN 유튜브 채널 2015년 9월 4일 방송 갈무리)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이후 곧잘 난민을 찾아갔다. 이는 지금 세계가 처한 비참의 종합지가 어디인지를 드러내고자 한 상징적 행위로 이해된다. 저임금 기피 직종의 노동력을 위해 이주민을 받아들이면서도 수단화하는 데 그치고 마는 우리의 여러 정책을 돌아보면, 박해를 피해 피난처로 이 땅을 찾아온 사람을 쉽게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철벽만 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어떤 노력도 없이 부작용을 먼저 걱정하고, 근거 없는 혐오를 퍼트리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다. 이젠 난민 문제를 우리의 과제로서 학습하고 준비해야 할 때다. 사실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 되는 문제다.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씩 하나씩 교육 과정 안에서, 작은 훈련 안에서 해나가면 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무작정 두려워하며,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삭제’만 할 뿐이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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