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데스크]

▲ 염수정 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시복작업을 시작했다. 지난 6월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10회 가톨릭포럼에서 서울대교구 총대리 염수정 주교는 "안 의사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모범"이라며, 안중근 의사가 "순교자"는 아니지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신앙 고백함으로써 의연한 신앙의 자세를 견지한 증거자"라고 밝혔다.

염 주교는 안중근의 동양평화사상과 노력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다"며, 안중근을 "민족주의 관점에서만 평가되는 반쪽짜리 인간"으로 만들지 않기를 당부하며, 서울대교구는 안중근 토마스 의사를 시복하기 위해 빠른 시일 내에 신학적 검토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서울대교구는 이미 6월 4일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와 더불어 일할 '서울대교구 시복시성 준비위원회'를 신설하였는데, 염수정 주교가 준비위원장을 맡고, 그밖에 최창화 몬시뇰, 김성태ㆍ조학문ㆍ안병철ㆍ허영엽ㆍ변우찬 신부 등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 준비위원회는 6월 18일 오전 11시 교구청 염 주교 집무실에서 회의를 열고 시복 추진을 위한 지침 마련 등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서울대교구가 시복을 추진 중에 있는 인물은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1792~1835) 주교를 비롯해 조선시대 및 근현대 신앙의 증인 570여 명이며, 여기에 안중근 의사도 포함되어 있다.

최근 들어 안중근의 시복운동이 전개될 만큼 한국천주교회, 특히 서울대교구가 안중근에 집착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난 4월 4일 노길명 교수(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가 <평화신문>에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시성을 바라며"라는 특별기고를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일각에서는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했던 잔 다르크가 시성된 것처럼 안 의사도 성인품에 올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왔다."며 지난 3월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근현대 신앙의 증인에 대한 시복 통합 추진'을 선언한 데 따라 안중근을 시복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건의했다. "안 의사가 시복 시성될 때, 그분이 지녔던 신앙은 우리의 삶과 민족사 안에서 더욱 살아날 것이며, 그분의 삶은 세계적으로 알려져 신앙의 모범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서울대교구가 안중근 의사를 시복하기로 결정했다면, 이는 노길명 교수의 지적대로 안중근의 신앙을 교회가 모범으로 살아갈 뜻을 지녀야 한다. 그러면 안중근의 신앙은 무엇인가? 겨레의 아픔을 자신의 신앙과 통합시킨 인물이 안중근이다. 그에게 정교분리 사상은 의미가 없었으며, 조선인의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했으며, 신앙인의 마음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제10회 가톨릭포럼에서 발제를 맡았던 조광 교수는 "안중근이 선교사들로부터 교회 밖의 인물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원산의 브레(Bret) 백 신부는 안중근의 독립운동을 교회 가르침에 어긋나는 정치행위로 간주하고 성사를 금했다.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종부성사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이처럼 철저히 교회의 버림을 받았던 안중근을 교회가 다시 받아들여 제 사람으로 만들려면, 교회는 일제강점기 일제에 협력했던 과거를 말끔하게 청산해야 한다. 안중근이 목숨을 바쳐 투쟁했던 일제의 잔재를 고스란히 뒤집어 쓴 채 안중근의 손을 잡아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1993년 8월 21일 김수환 추기경은 혜화동 교리신학원 성당에서 집전한 안중근 추모미사에서, "일제 당시의 제도교회가 올바르게 하느님 백성을 인도했다고 보기 힘든, 한국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친일적인 행위가 있었음을 한국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마음 아파한다." 며 "교회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과를 하라면 사과를 할 것이며 속죄를 해야 된다면 속죄를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추기경 개인의 발언이었으며 서울대교구의 공식 입장은 아니었다.

급기야 2010년 순국100주년을 기념하면서, 후임인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추모미사에서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생애와 일치시키고자 노력하신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독립 투쟁과 의거는 신앙의 연장선상이었다"고 강조하며 안중근이 가톨릭 신자임을 새삼 강조했다. 그러나 지난 몇년동안 안중근에 대한 교회내 평가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서울대교구는 단 한 차례도 정확히 '교회의 친일행각'에 대한 공식적 참회를 표명하지 않았다. 다만 안중근 의사를 교회와 연관짓기 위해 묵주기도 100만 단 봉헌운동과 같은 현양운동에 몰두했을 뿐이다. 안중근은 요즘 '김수환 추기경'과 마찬가지로 천주교회의 '종교적 상품' 또는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장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울대교구는 아직도 안중근이 반대한 것을 반대하지 않으며, 안중근이 실천한 것을 실천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안중근이 반대한 것은 평화의 반댓말인 '군국주의'다. 서울대교구는 적어도, 그 연장선 상에서 친일행위를 충분히 반성해야 하지만,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위해 친일인사 명단이 발표되었을 때 가장 먼저, 단 하룻만에 '유감'을 표명했다. "그 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안중근을 내친 것도 어쩔 수 없었던 중의 일부인지 묻고 싶다. 한창 친일논란이 불거지던 2008년 친일인사로 거명된 노기남 대주교의 이름을 따서 '노기남관'이라는 교원 기숙사(사제관)를 축복했다. 

서울대교구(일제하 경성교구)는 1940년 11월 10일에 명동성당에서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을 결성하고 황기 2,360년 봉축식을 거행하면서 1941년부터 매월 첫주일을 ‘애국주일’로 삼는다는 결정을 내렸으며, 이날 신사참배를 했다. 1942년 3월에는 <대동아전쟁 기구>를 반포하고 이 기도문을 공과(功課)에 넣어 신자들로 하여금 매일 일본군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게 만들었다. 세부 지침으로 매일 아침마다 일본 황실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저녁에는 전몰 장병을 위해 기도하도록 규정했다. 매주 황군의 무운장구를 위한 기도를 하고, 매월 승전을 위한 기원제를 지내며, 특히 대축일마다 장엄한 시국기원제를 지내도록 지침을 정했다. 이 과정을 주교와 사제들이 주도했으며,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교회 차원에서 친일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울대교구는 일본 천주교회처럼, 안중근 시복운동에 앞서 친일행위에 대한 공적 참회에 먼저 나서야 한다.

또한 서울대교구는 안중근이 실천한 것을 스스로 지금여기에서 실천하고 있는지 먼저 성찰해야 한다. 과연 서울대교구는 겨레가 처한 현실에 대해 적절히 예언자로서 발언하고 있는가? 행동하고 있는가? 전국에서 교구 차원에서 4대강 순례에 나서고 있는데, 서울대교구도 그리 하는가? 오히려 천막기도를 하려는 사제들을 안중근에게 당시 교회가 그리 했던 것처럼 내치지 않았는가? 용산참사 현장에서 사제들이 유가족들과 함께 아파하고 있을 때 교회는 얼마나 마음으로 아파했는가? 정진석 추기경은 가좌동성당은 갈지언정 왜 용산엔 올 수 없었는가? 여기에 답변할 수 있어야 한다.

2008년 어린 청소년들까지 거리로 나와야 했던 광우병 쇠고기 파동 때 왜 서울대교구에서 운영하던 평화방송/평화신문은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사제들과 신도들의 참여를 보도하지 않았는가? 여전히 '우리들만의 천국'을 꿈꾸고 있는, 교회 안에 갇혀 지내는 교회가 과연 안중근 의사를 시복하려는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만약 서울대교구가 안중근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지금까지 보여준 체질을 완전히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겨레 앞에서 복음화될 마음이 있어서 시복 운운하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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