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나눔 · 섬김을 부르짖는 것은 위선이며 하느님에 대한 배신"

▲ <Church Pew with Worshippers>, Vincent van Gogh(1882)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미사 중에 있어서는 안 될 꼴사나움이 되살아났다고 한다. 교회에서 무슨 정치 얘기냐며 소리를 지르고 삿대질을 하며 대드는 추태다. 국가폭력이 난무하고 국민의 기본권이 짓밟히던 군부독재 시절에 흔히 보던 일이다. 현 정부 들어 확실히 역사는 이삼십 년 퇴행한 모양이다.

물론 그들의 주장은 세속의 정치와 신앙을 분리하자는 고결한 뜻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 충정은 평가돼야 할 것이다. 정교분리의 참 뜻은 정치권력과 교회권력이 유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국가권력이 특정 종교나 교리를, 교회도 특정 정파나 이념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권모술수 정도로 정치를 폄훼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다. 사실은 일상생활에서 우리 삶을 규정하는 공동체에 관한 모든 결정과 실천이 정치다. 누구도 정치에서 벗어날 수 없고 정치를 버릴 수 없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나누고 그들을 섬기라고 가르치신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고 몸과 영혼을 달래주라고, 사회의 빛과 소금이 돼 구조적인 불의와 부패, 억압을 없애라고 명령하신다. 단순히 말과 혀가 아닌 행동으로 옮기라고 단단히 이르신다. 바로 이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 정치다. 신앙이 믿음을 키우는 양심이자 윤리의 문제라면, 정치는 그 믿음을 실천하는 행동이다.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고 실천한다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기고 소외시키는 구조적 불의를 외면하고, 말로만 나눔과 섬김을 부르짖는 것은 위선이며 하느님에 대한 배신이다. 무수한 생명과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면서 자신의 패거리만을 챙기는 불의한 정권에 저항하지 않고 침묵하는 일이 바로 정교유착이고 결탁이다. 방관과 침묵은 결국 특권과 반칙을 일삼는 기존 유력자에 봉사하고 힘없는 자를 짓밟게 되기 때문이다.

여러 선진국의 역사를 보더라도 교회가 정치 얘기를 활발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민주주의, 경제적 자본주의, 사회보장제도를 결합한 현대 복지국가의 기틀을 다져 가난과 질병을 퇴치했다. 일찍이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는 극단적인 부의 편중과 빈부격차를 낳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구조를 방조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자고 말하는 교회를 질타했다. 돔 헬더 카마라(Dom Hélder Pessoa Câmara) 대주교는 한탄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하면 성자라 하면서, 가난을 낳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 빨갱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불의한 권력에 당당하게 맞서며 민중의 삶을 보듬고자 자신을 희생했다. 교회가 주님의 사랑과 정의, 평화를 외치는 데만 머물러서는 공허하다. 밖으로 나가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교회 사회사목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박영일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

* 천주교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소식지 <정의평화> 2012년 5월호에 실린 글을 인천 정평위 허락 하에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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