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상징을 꼽으라면, 단연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장식을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지와 귀걸이 또는 목걸이, 심지어 묘비에도 십자가를 새겨 넣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가정에서는 십자가상을 비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는 가톨릭 신자건 개신교 신자건 마찬가지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십자가는 더욱 큰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더 이상 장식으로만 머물지 않고, 일종의 신앙을 고백하는 몸짓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호경(聖號經)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일상생활에서, 미사를 비롯한 각종 전례와 기도, 그리고 모임 등에서 성호를 긋습니다.

스포츠 경기에서도 가톨릭 신자 선수는 금방 눈에 띕니다. 경기 전 성호를 긋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서로를 흠씬 두들겨 패야 이길 수 있는 복싱경기에서 남미 선수끼리 맞붙으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성호를 긋습니다. 하느님의 가호에 힘입어 경기에서 상대방에게 더 많은 타격을 입혀서 승리하게 해 달라는 기원이겠지요.

▲ 사도 바오로 (4세기 에페소 벽화)

양쪽 다 성호를 긋는데 하느님은 누구 편일까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누구의 편을 들어주실까요?

성호(聖號)는 한자말 그대로 ‘거룩한 표지’를 의미합니다. 성호를 그으면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스스로가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사실을 외적으로 드러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청하는 행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표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호는 십자성호(十字聖號)의 준말입니다. 성호를 긋는 모양이 십자가 모양이라서 그리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십자가 표지’(signum crucis)라 부릅니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십자성호라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호가 그리스도교에 자리하게 된 데는 사도 바오로의 ‘십자가 신앙’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도구라는 사도 바오로의 신앙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런 바오로의 신앙은 그의 편지들에서 아주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라는 구절을 들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십자가 신앙을 생활 안에서 드러내고자 노력했습니다. 2세기 무렵부터 십자가 신앙은 신자 개인 신심으로 발전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간단한 십자성호를 긋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당시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한창이어서 순교의 영성과 더불어 십자가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최고봉으로 여겨졌습니다.

160년경 카르타고에서 태어난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생활에서 십자성호를 이마에 긋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행하거나 어디를 갈 때, 집 안에 들어오거나 밖으로 나갈 때, 신을 신을 때, 목욕을 할 때, 음식을 먹을 때, 촛불을 켤 때, 잠들 때, 앉아 있을 때, 무슨 일을 할 때, 그때그때마다 그리스도인은 이마에 십자성호를 그었다”고 증언합니다.

4세기, 예루살렘의 치릴루스(315~387년)는 자신의 저서 <교리집>(Catecheses)에서 “십자가를 고백하는데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십자가가 우리의 상징이 되도록 합시다. 우리의 이마에 손가락으로 십자가를 도드라지게 그립시다”며 신자들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습관은 또한 4세기경부터 전례에도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제가 신자들에게 안수를 준 다음 십자가를 머리에 그어 축복했습니다. 이는 다시 빵과 잔 등에도 십자를 긋는 관습으로 발전했는데, 이때부터 신자들은 전례에서 이마뿐 아니라 가슴에도 작은 십자 표시를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치루스의 테오도레투스(393~457년)는 “이 십자성호는 당신의 손으로 어떻게 다른 이에게 축복을 줄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를 기원하며 세 손가락을 모으십시오. 아버지 하느님, 아들 하느님, 성령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어깨와 왼쪽 어깨, 성호 긋는 순서의 의미

5세기에 이르러 십자성호는 오늘날 우리가 성호를 긋는 형태와 비슷하게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십자성호와는 달리, 동방교회의 십자성호처럼 머리에서 가슴, 그리고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로 십자성호를 그었습니다. 예수회 사제이자 신학자인 허버트 터스튼(Herbert Thurston)은 저서 <십자성호>(Sign of Cross)에서 본래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모두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로 십자성호를 그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12세기경부터는 오늘날 우리가 미사에서 복음을 듣기 전에 하는 것처럼 이마와 입술 그리고 가슴에 작은 십자가를 그리는 형식이 전례에 도입되었습니다. 하지만 큰 십자성호는 여전히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로 그었습니다. 교황 인노첸시우스 3세(재위 1198~1216년)의 가르침에 그 의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십자성호는 세 손가락을 이용해서 긋습니다. 왜냐하면 성호를 긋는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가시적인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성호는 먼저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긋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지상으로 강림하셨고, 또한 유대인(오른쪽)으로부터 이방민족(왼쪽)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이미 12세기부터 서방교회에서는 점차 십자성호를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긋는 풍습이 엿보입니다. 다시 교황 인노첸시우스 3세는 “어떤 이들은 십자성호를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긋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죽은이들의 나라에서 천국으로 건너오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비참한 존재(왼쪽)에서 영광스러운 존재(오른쪽)로 탈바꿈했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12세기에는 이미 십자성호를 긋는 두 가지의 방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부 · 성자 · 성령을 상징하며 세 손가락을 모아서 성호를 긋던 풍습은 사라지고, 손가락을 모두 모아서 하는 방식으로 변화했습니다. 또한 오늘날처럼 오른쪽 어깨가 아니라 왼쪽 어깨를 먼저 찍는 방식으로 변했습니다.

십자성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삼위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성호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김홍락 신부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시 빈민촌에서 도시빈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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