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애도란 남겨진 인간이 죽어간 사람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 충격과 고통의 단계를 겪어 나가면서 사별을 수용하고 삶으로 재적응하는 과정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상실의 고통 속에서 충분히 그 과정을 슬퍼하고 견디어야 그 시간과 공간을 넘어설 수 있다. 만약 슬픔과 고통을 피하고 억누르면 그 감정들이 마음이나 몸의 질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제대로 된 애도가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이나 사회도 병들고 지속가능할 수 없다. 애도되지 못한 감정들은 어느 순간 다른 방식으로 등장하여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인간의 삶에서 애도가 갖는 보편적 성격에도 애도하는 삶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애도는 누구의 삶과 죽음은 기억되고 슬퍼할 만한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규범이 작동되는 가운데 움직인다.1) 그렇다 보니 국가와 사회는 누가 애도할 만한 인간인지를 선별하고 차별하면서 상실과 애도를 봉쇄시킨다. 우리 사회는 누군가의 애도는 장려되거나 수용되지만 누군가의 애도는 실정법을 위반한 죄가 된다. 세월호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유가족들이 청와대 앞으로 걷는 것조차 집시법 위반을 운운하며 막던 국가권력 그 자체는 국가폭력의 한 모습이다.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뿐 아니라 국가폭력과 재난 희생자들이 진실을 알고 싶다는 요구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죽음에 대한 책임자 처벌 및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이 국가권력에 의해 구조적으로 막히기도 한다. 한국 사회가 어쩌다 이토록 애도하기 힘든 사회가 된 것일까?

2014년 4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봉헌된 ‘세월호 참사로 인한 희생자들과 모든 이웃을 위한 참회의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기도하고 있다. ⓒ정현진 기자<br>
2014년 4월,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봉헌된 ‘세월호 참사로 인한 희생자들과 모든 이웃을 위한 참회의 미사’에 참여한 이들이 기도하고 있다. ⓒ정현진 기자

피해자의 사별 경험, 충분히 말하지 못해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첫째 민초들이 겪은 다양한 폭력으로 인한 죽음경험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폭력을 경험하였으나 말하지 못한 고통은 그대로 피해자에게 독이 되어 돌아온다. 국가폭력으로 인해 가족이나 지인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하였으니 치유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비탄의 고통은 그대로 민초들의 삶에 녹아들 수밖에 없었다.

끔직한 비유이지만 1945년 이후 한국이라는 나라는 많은 이의 죽음 위에 지어진 집과 같다. 식민지 경험과 해방 후 한국이라는 나라를 만들기까지 또는 나라를 만들고 나서도 많은 사람이 피붙이와 삶터, 일터를 잃는 상실을 경험해야 했다. 한국전쟁과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폭력의 경험은 고스란히 트라우마로 남고 그 경험은 대를 이어 지금껏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OECD 내 자살률 1위, 산업재해 1위라는 통계는 어쩌면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구조적이고 내면화된 폭력으로 인한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 외면하거나 회피하고 부인해 온 결과를 반영한 것은 아닐까.

또한 구조적이고 내면화된 폭력의 경험은 피해자의 입장이 아닌 가해자의 입장에서 해석되어 전유되었고 누군가의 희생을 정당화 하는 논리로 전환되었다. 가령, 전쟁에서 겪은 어떤 죽음은 나라를 위한 ‘영광스런 희생’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한국전쟁 이래 국가가 주도한 합동위령제에서 군인의 죽음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영광스런 일로 드러나야 했기에 유가족의 통곡, 슬픔은 사실상 금지되었다.2) 베트남 전쟁에서 일어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어쩌다 발생한 ‘작은 실수’로 포장되기도 하였다. 피해자가 경험을 말하고 공동체와 국가는 ‘사회적으로’ 듣는 관계가 만들어지지 못한 조건에서 유가족들은 슬픔을 만나고 그 감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었다.

집단학살, 고문사, 의문사에 붙여진 낙인

두 번째 국가권력은 ‘집단학살, 고문사, 의문사’ 등에 관한 죽음을 ‘낙인화’ 하였기에 그동안 유가족들은 애도할 수 없었다 또한 유가족들은 상실 경험에 대해 이웃과 사회로부터 지지받지 못하였으며 숨죽일 수밖에 없었다. 집단학살, 고문사, 의문사에 붙는 낙인의 꼬리표는 다양했다.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가해 권력들은 “내가 죽인 것은 사람이 아니라 빨갱이였다”, “시민이 아니라 폭도였다”와 같은 말들을 거리낌 없이 내뱉었고 이러한 언설들은 주류 미디어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었다. 보수 정치인들은 빨갱이와 폭도에겐 인권이 없고 죽어 마땅하다는 이미지를 피해자에게 부여했다.

그 과정에서 낙인 찍힌 죽음은 ‘죽음이 아닌 것’이 된다. 유가족들이 상실을 수용하고 인정해야 비로소 애도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그 과정이 사회로부터 차단되었다. 해소되지 못한 경험들과 감정들은 유가족의 마음에 남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유가족의 입장에서는 가족을 잃은 것도 고통스럽고 힘든데 그 죽음으로 인해 사회와 주변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경험하는 2차 피해에 놓이기도 했다. 죽음을 말할 수 없는 유가족에겐 시간이 멈춘 것과 같은 상황에서 상실을 경험했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시간과 공간 속에 머문다.

멀리 거슬러 갈 것도 없이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농성을 하는 철거민이나 노동자,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진 백남기 농민에 대한 ‘폭도’ 프레임은 주류 언론을 통해 너무나 익숙하게 들어왔던 단어다. 전두환 신군부에 저항한 광주 시민들에게 ‘빨갱이와 폭도의 폭동’이라는 낙인이 부여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지금도 보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5.18에 관한 북한군 개입설을 공식 석상에서 발언한다. 배제와 낙인의 굴레에 갇힌 죽음에 대한 애도는 죄가 된다. 왜냐하면 신군부의 군사쿠데타에 저항하며 죽어간 5.18 광주 시민들을 애도하는 것은 신군부가 자행한 위법하고 부당한 권력 찬탈과 치부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또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경찰 국가가 시민의 저항을 어떻게 폭력을 동원하여 무력화시키는지 드러내기 때문이다.

세 번째 한국 사회가 과거사 이슈를 해결하면서 피해자가 죽음에 이르게 된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책임져야 할 기관이 책임지는 과정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국가나 책임 있는 사람들의 공식적인 사과는 없거나 부족했고 국가의 위법행위에 대한 배상은 부재했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에서 이루어진 과거사 해결은 ‘피해자에 대한 제한적인 명예회복과 보상’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이원재는 “진실은 우회하고 가해자의 책임은 묻지 않는 방향으로 나갔다”고 지적하며 “광주민중항쟁 피해자에 대해 위로금 명목으로 지급되던 경제적 보상이 과거사 정리의 유력한 모델이 되었다3)”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삶이 회복되지 않고 고립되거나 파편화되었다고 말했다.

1999년에 제정된 의문사법이나 2013년에 제정된 진실화해위원회법은 조사권은 있으나 수사권이 없었고 이러한 제도적 한계로 피해자가 겪은 인권침해를 적극적으로 밝혀내지 못했다.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하니 사건의 책임자 역시 밝혀지지 못했고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는 사라진 채 애도는 가로막혔다.

의문사의 경우 의문사법에 따라 국가기구로부터 어떤 죽음이 ‘의문사’라고 인정 결정을 받았더라도 피해사실에 관한 진상규명은 없었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불처벌의 망각 속으로 넘어갔다. 정원옥 연구자는 “적지 않은 의문사가 국가기구로부터 인정 결정을 받았다. 하지만 책임자와 가해자가 특정된 사건은 한 건도 없다”4)라고 지적하였다.

유가족의 입장에서 왜 진실이 중요할까?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그/그녀가 어떻게 죽어 갔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 애도의 과정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죽어간 사람이 왜, 어떻게 사망하게 되었는지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죽음의 과정을 아는 것은 망자에 대한 명예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죽음에 대한 사실들이 제대로 드러나거나 밝혀지지 못한다면 유가족이나 지인은 지연되거나 만성화된 슬픔을 경험할 수 있다. 피해자가 진실을 충분히 수용하고 이해할 때 유가족들은 비로소 제대로 애도의 과정을 겪어 나갈 수 있다.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과 노란 종이배들. (이미지 출처 = flickr.com)<br>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과 노란 종이배들. (이미지 출처 = flickr.com)

진실과 정의가 회복되기 위한 함께 애도하기

어떤 독재자가 자행한 인권침해는 ‘단지’ 그 독재자만 감옥에 보내는 것으로 끝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독재자에게 협력하거나 독재자가 자기 맘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내버려 둔, 저항하지 않은 시민들의 존재는 독재자와 데칼코마니(종이 위에 그림물감을 두껍게 칠하고 반으로 접거나 다른 종이를 덮어 찍어서 대칭적인 무늬를 만드는 회화 기법.)다. 시민들이 방관하고 모른 척하는 사이 독재자는 자기 마음대로 혹은 시민들의 침묵과 묵인 속에 인권침해를 자행한다. 그래서 인권회복을 위한 기나긴 여정은 독재자를 감옥에 보내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의 인식, 관행, 태도, 제도 등 다층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과거사 해결은 현재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관계를 재조직하는 가운데 시작된다.

“지금 해결할 것도 많은데 과거 일은 이제 그만 덮자”라거나 “과거사 사건은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해결할 일이다”와 같은 생각은 어쩌면 독재자를 만들어 내는 시민의 인식을 반영하는 모습은 아닐까. 과거로부터 일어난 인권침해는 현재로 연결되며 미래로 이어질 수 있음을 기억한다면 과거사 이슈는 현재 진행형이며 지금 우리와 미래 세대가 감당할 책임의 문제다. 진실과 정의가 회복되기 위해 ‘함께 애도하기’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책임을 묻는 과정이다. 과거사 이슈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회복하는 길에 사회 구성원이 함께 성찰하고 참여해야 할 영역으로 전환되어야 할 시점에서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활동을 기대해 본다.

 

1) "삶-죽음을 기억하는 사회적 애도는 시작되었다", 몽, 2021, 인권운동사랑방, www.sarangbang.or.kr
2) "정치적 애도를 통한 삶의 재건, 민주주의와 인권", 유해정, 2018, 18(2), 181-220쪽 : 재인용
3) '과거사 피해보상에 대한 비판적 검토: 광주민중항쟁 및 민주화운동에 대한 피해보상과 국가배상의 비교를 중심으로', 이영재, 2010, 기억과 전망 23권, 199-234쪽
4) '의문사의 진실규명에서 민주화 운동 관련성 요건의 기능과 효과', 정원욱, 2015, 민주주의와 인권, 15(3), 351-384쪽

최은아
25년 동안 천주교인권위원회,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상임활동가로 일했다.
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인권, 애도, 노동에 관해 공부하며 글을 쓰고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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